말씀묵상

[말씀묵상]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

김혜숙 (막시마) 선교사rn※ 김혜숙 선교사는rn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
입력일 2018-11-13 수정일 2018-11-14 발행일 2018-11-18 제 3120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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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일 
제1독서 다니 12,1-3/ 제2독서 히브 10,11-14.18/ 복음 마르 13,24-32)

‘연중’은 ‘매일의, 평상의, 일상의’ 삶을 의미합니다. 연중시기를 마무리하는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단순히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일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은총으로 시작된 구원의 여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이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의 나에게 나의 믿음이 최종목적에 닿아 있는지, 희망에 찬 삶인지, 그러한 믿음과 희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빛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종말의 현상과 그 시간에 관한 말씀보다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현재의 삶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신덕(믿음, 희망,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타자와 세상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어떤 공동의 집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부부가 어떻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지,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부모에게 어떤 자녀가 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인간의 기본질서를 ‘참 사랑’에 두는 것이 곧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돌을 던진 물이 파장을 일으키고 점점 넓게 퍼지듯 말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이름, 인격으로 모두에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존중으로 나타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의 존재에 대한 존중은 그를 존재 그대로 인격으로서의 인간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품위를 드러내는 ‘몸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감춘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 입니다. 참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도, 처음부터 주어졌던 선택의 자유가 끝까지 보장되기 위해서도 그 시간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그날의 현상을 봅시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24-25절) 구약에서부터 종말의 때를 묘사하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내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이 하느님께 속해 있음이요, 그날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존 마틴의 ‘최후의 심판’.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28절) 성경에서는 무화과 나무가 여러 의미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곧 ‘때’와 ‘변치 않음’으로 묵상함이 좋겠습니다.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사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여름이 다가옴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무화과 나무의 변화현상은 여름이라는 때를 알려주는 확실한 징조였습니다. 24-25절의 현상들은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먼저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그다음 새 잎이 나면서 무성해지는 여름이 오는 자연의 순환이 정확합니다. 24-25절의 징조가 일어나면, 예수님의 말씀도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름”으로 번역된 ‘데로스’는 ‘끝’, ‘최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케츠’와 어원이 같습니다. 아모스가 ‘여름’을 최후에 있을 심판으로 상징했습니다.(아모 8,1-3)

땅을 바라보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희망하고 하늘을 향한 그 눈으로 땅을 바라봐야 한다는 기쁜 소식을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통해 내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내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이 나를 믿는, 그래서 희망과 사랑이 상호 교환되는 삶입니다. 나의 선한 행위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단순히 인간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하느님의 자비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분의 은총이 선재해 내가 그 삶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삶에 의해 성장합니다. 그것이 응답의 삶입니다. 내가 겪어야만 했던 삶의 희로애락은 단순히 운이 나빠서도 좋아서도 아닙니다. 믿음의 씨가 싹이 나고 잎이 자라는 변화를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삶, 곧 응답하는 삶에 대해 보겠습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사는 것은 인격들 간의 친교를 지향합니다. 열심히 분주히 사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바리사이들도 열심히 살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 열심히 살았지만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율법과 관습으로 자신들의 울타리를 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법이 자신들을 구원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성장은 정해진 규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 안에서 자신이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많은 초대에 응했고, 또 그들과 먹고 마셨지만 그곳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최종 친교의 완성인 하느님께 눈을 돌리도록 도왔습니다. 이 삶은 내적 가난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내적 가난은 너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자신을 내어주면서 그를 품게 합니다. 내어줄 수 있기에 가난하고 얻을 수 있었기에 부유합니다. 이는 그분의 현존, 눈이 부시는 영광입니다.

이 세상 어떤 피조물도 자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를 확실히 아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들어서 압니다. 스폰지가 물을 먹고 물을 내어놓듯이 성령께서 그 생명의 숨결을 우리에게 불어넣으셨고, 우리 몸은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빼앗기지 말아야겠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빼앗기지 않아야 하고, 흘러가는 세상의 방법에 도둑맞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졸지 말아야 합니다.(마태 24,43)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온몸으로 지켜야 합니다. 도둑이 직접 훔쳐가져 가는 것도 있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의 마음에 가라지를 뿌려 놓는 것입니다.(마태 13,27) 서서히 다 잃어버리도록 말입니다. ‘이 정도는’ ‘이번만’ 이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무감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하시고, 자신은 몸을 땅에 엎드려 아버지께 기도하셨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 하늘과 새 땅을”(묵시 21,1) 자신의 삶 속에서 만들어 가는 자입니다. 삶을 아는 자요 생명을 지닌 자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그날은 큰 희망이었던 하느님의 계획이 찬란히 빛나는 영광의 순간이요 완성의 순간이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일어나 뛸 듯이 춤추고 즐거워하며, 서로에게 축하합시다. 우리의 희망이 이루어졌습니다!

김혜숙 (막시마) 선교사rn※ 김혜숙 선교사는rn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