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평신도가 바로 교회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입력일 2018-11-06 수정일 2018-11-07 발행일 2018-11-11 제 311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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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제1독서 (1열왕 17ㅡ10-16_  제2독서 (히브 9,24-28)  복음 (마르 12,38-44)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면서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 이외의 모든 신자입니다. 그들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하느님의 백성으로 교회와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 성령의 열매를 맺고(사제직),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예언직), 그리스도께 봉사하는(왕직) 사명을 수행합니다.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현세의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 뜻대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 복음화와 교회의 구원사명을 수행하는 일꾼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세웁니다.(교회헌장 31)

한국교회는 지난해(2017.11.19.~2018.11.11.)를 ‘한국평신도희년’으로 기리며 ‘그리스도인답게 살겠습니다’라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신앙을 용기 있게 고백하고, 창조질서의 회복과 생명수호에 앞장서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가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등 희년정신의 실천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하고 한 해를 지냈습니다. 희년 정신에 얼마나 충실한 삶을 살아왔는지 한번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당신께 의탁하는 가난한 이들을 돌봐주시는 사랑이심을 압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가난한 과부가 생계비를 하느님께 바치는 참된 봉헌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제1독서와 복음에는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별에 차이가 있는 지중해 지역의 독특한 문화에 비추어보면 과부의 삶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남성은 외부에서 공적역할을 하지만 여성은 집안생활을 하기에 과부의 경우는 남편을 잃은 사실도 마음속에만 간직합니다. 장남이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처지는 더욱 어렵고, 아들이 없다면 친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레위 22,13; 룻기 1,8) 상속법에서도 제외된 과부는 하루벌이로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1열왕 17,10-16)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땔감을 줍고 있는 한 과부에게 마실 물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청합니다. 그녀는 수년간 가뭄 끝에 단지에 남은 밀가루 한 줌과 기름으로 어린 아들과 음식을 만들어 먹은 뒤 죽으려고 땔감을 마련하던 참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빵을 만들어 내오면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굳게 믿고 실천한 과부는 기적을 체험한 뒤 굶주림 없이 살아갑니다.

제2독서(히브 9,24-28)는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십자가상에 당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치셨음을 전합니다.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따릅니다.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 굶주린 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며, 의인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화답송, 시편 146)

프랑수아 조제프 나베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 계시어 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넣는 모습을 보신 뒤,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칭찬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연민의 정을 보이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마르 13,1-2)도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고입니다. 외적인 품위 유지를 중시하는 지중해 문화를 감안할 때 이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를 몽땅 봉헌하고서도 부끄럽게 여겼으리라 짐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 12,38)고 이르십니다. 모세의 율법전문가인 그들은 처음에는 구약에 기록된 하느님의 뜻을 해석했으니, 비빌론 유배 이후는 대부분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평신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를 나무라시며 ‘코르반’ 이야기(마르 7,11)를 하신 적도 있습니다. 코르반이란 유다인들이 자신의 재산이나 가진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신성시하여 부모를 공양하거나 과부처럼 가난한 사람에게 사용하지도 못했답니다. 그런데도 과부가 성전에 봉헌의무를 다하자니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종교적 가면을 쓰고 나눔 없이 자신의 체면이나 세우려고 긴 겉옷과 성물처럼 눈에 잘 띄는 곳에 지출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군중들보다 높은 단상에 자리를 차지하고, 잔치 때엔 귀빈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자들은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은 것입니다.(마르 12,40)

현대판 코르반이 없는 건 아닙니다. 화려한 성전을 지어 ‘주님께 봉헌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위화감을 주고 그들을 돌보지 않거나, ‘저의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애덕에 인색하다면 코르반을 외치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빈방이 없어 구유에서 나신 예수님의 가난한 삶을 묵상해봅니다. 주님께서 머무실 방 한 칸이 없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셨고, 빈 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묘지 한 평이 없어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의 도움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비움의 은총이고, 정성 어린 희생이 참된 봉헌입니다. 평신도희년을 보내며 기도와 성사와 봉사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보물임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교회입니다, 자유로이 주님의 뜻을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된 교회가 살아있도록 자기 몫의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