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목마 태워 주는 건 좋은 거지요 / 김형태

김형태 (요한) 변호사rn
입력일 2018-10-30 수정일 2018-10-31 발행일 2018-11-04 제 3118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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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비가 내립니다. 저 멀리 도봉산 희맑은 선인봉 암벽에도, 우리 집 마당 불그레 변해가는 감나무 이파리들에도, 대문 앞 시멘트 골목길에도,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립니다. 뜰 한구석에서 환하게 빛나던 구절초 하얀 꽃들은 비에 젖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늘어졌습니다. 언제 꽃이었나 싶게 흰 빛이 꺼져버린 것들도 있습니다. 저 꽃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구순을 바라보는 ‘자랑스런 레지오 마리애 단원’ 우리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 쪼그려 앉아서 일일이 그것들을 일으켜 세우고 있습니다. 저 늘어지고 스러진 늦가을 꽃들에서 당신 모습을 보신 걸까.

서산대사 휴정을 떠올립니다. 스님은 말년 자신 영정 뒷면에 이런 게송을 남겼습니다. “八十年前渠是我(팔십년전거시아)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후아시거)” (팔십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저것일세.) 평생을 살면서 ‘내가 나다’하고 지내왔는데 돌아갈 때 보니 ‘나’라는 것이 저 그림 같은 허깨비에 불과했구나.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솔로몬의 저 영화로운 삶도 그저 들에 핀 나리꽃만 못하다 하셨지요.

멀리 사는 네 살배기 외손주 녀석이 지난여름 끝자락부터 달포를 온 집안 휘젓고 다니다 지난주 비행기 타고 가버렸습니다. 노모는 집안 곳곳에 남은 증손자 손때에 마음 허전해 합니다. 지하 유리창에, 화장대 거울에, 내 차 앞 유리에, 죄다 돌아가며 녀석 손바닥이 떡하니 찍혀 있습니다. 무슨 안중근 의사 글씨 옆에 찍힌 손바닥 도장처럼….

“할아부재, ‘토이 스토리’ 틀어 줘”, “너 어제도 봤잖아”, “딱 한 번만” 이십 년 전쯤 처음 본 이 ‘토이 스토리’ 만화영화를 녀석 덕에 이번에 한 열 번도 더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범상치 않습니다. 주인공 버즈 라이트는 지구를 구하는 우주인 영웅을 본 뜬 장난감 인형입니다. 문제는 제가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고 정말 영웅인 줄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주 비밀임무를 수행하라.” 장난감 버즈 라이트가 “알았다.” 하면서 뛰쳐나가려는데 갑자기 화면에 저와 똑같이 생긴 수많은 장난감들이 가게에 진열돼 있는 광고가 뜹니다. 이걸 보고 경악하는 장난감 버즈 라이트. 그는 ‘내가 제일 힘 쎄’ 하면서 휘두르던 제 팔뚝에 ‘메이드 인 타이완’이란 제조지 표시가 찍혀 있는 의미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절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이제 알아버렸어. 내가 누구인지. 난 장난감이야. 이젠 꿈도 꿀 수 없어.” 그래 장난감.

그저 유한한 피조물. 우리 어머니가 늦가을 마당가에 비 맞고 쓰러진 국화에서 당신 모습을 돌아보듯이, 휴정 스님이 “나는 한낱 저 영정 속 그림일 뿐이로군” 하셨듯이, 그저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

“뭐 그렇다고 그럴 건 없잖아.” 손주 녀석이 요즘 한창 젠 체하면서 하는 표현을 빌면 이렇지요. “뭐 지가 장난감이라고 꿈까지 버릴 건 없잖아.”

아니, 지가 장난감인 걸 아는 것만 해도 어딘데. 어려운 말로 하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공(空)함을 깨달은 거고, 쉬운 말로 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 하느님의 자녀라는 걸 똑똑히 알게 된 거지요.

죽을 때까지 이걸 모르고 그저 저 잘난 줄만 알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걸 아는 것만 해도 도 통한 거죠. 그러면 저 버즈 라이트처럼 나 말고 남들도 보이겠지요.

홍 아가타 우리 어머니는 매일 아침미사 끝나면 다른 할머니들하고 과자도 먹고 커피도 마시다 옵니다. 어제는 이런 하소연을 하시더군요. “아, 글쎄 어느 정신 나간 할매가 김정은이가 문재인 목마 타고 있는 핸드폰 사진을 이 사람 저 사람 보여주더구나.”

그래요? 저런 한심한 할매가 다 있나. 그런데 어머니, 곰곰 생각해보니 그 할매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 예수님 말씀을 잘 전하는 거네요. 남쪽 형님이 어려움에 빠진 북쪽 동생 목마 태워주고 ‘힘내라, 힘!’ 격려해주라는 거 아닌가요?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 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 (요한) 변호사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