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17·끝) 음주와 음복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rn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
입력일 2018-10-23 수정일 2018-10-23 발행일 2018-10-28 제 3117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하느님 축복 나누며 공동체 일치감 갖게하는 행위
술은 신과 조상, 인간을 연결시키는 매개체
‘광약’이라고 불리기도… 절제와 예법 강조

우리의 제천의례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파종 직후인 오월, 또는 추수 직후인 시월에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고 감사하기 위해 행해졌다. 눈에 띄는 것은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마한의 시월제 때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일 음주가무했다는 점이다. 술은 가무와 더불어 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예물이자, 신과 교통하는 매개체였던 것이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들어간다고 여겼다. 따라서 제사드릴 때 향을 피우는 것은 혼을 부르기 위함이고, 술을 모사에 붓는 것은 백을 부르고자 함이었다. 양의 영과 음의 영을 합치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술이었던 것이다. 제천의례에서 그랬던 것처럼, 제사에서도 세상을 떠난 부모와 조상을 만나기 위해 술이 매개 역할을 했다. 더욱이 술은 제사가 끝난 뒤 자손들이 음복하면서 선조의 덕을 기리는 한편, 서로 일체감을 갖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예수님의 첫 기적이 카나 혼인 잔치에서의 술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요한 2,1-11)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술이 육화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매개체가 됐던 것이다. 술의 역할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통해 성찬례를 제정했던(마태 26,26-28) 데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미사의 근원이 된 이 대목은 신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술의 기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최후의 만찬 이후 오늘날까지 미사를 통해 빵이 성체로, 술이 성혈로 변화해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하나가 되는 계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술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선남선녀가 만나 가정을 꾸리는 혼례에 있어서 술은 빠질 수 없는 품목이었다. 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하는 교배지례 후, 서로 술잔을 나누는 합근지례 또는 근배례를 행했다. 먼저 표주박 잔에 술을 따라 신부의 입에 댔다가 신랑에게 주어 마시게 했다. 그 답례로 다른 표주박에 술을 따라 신랑의 입에 댔다가 신부에게 주어 입에 대게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잔은 서로 교환해서 마시게 했다. 이를 합환주라 했다. 이는 신랑과 신부가 청실과 홍실로 묶은 표주박에 담긴 술을 교환해 마심으로써 하나가 되는 의식이었다.

이처럼 술은 신과의 만남, 조상과의 만남, 그리고 인간과의 만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술은 사람에게 유익한 약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으로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 불렸다. 예로부터 술은 기혈을 순환시키는 데 도움이 됐으므로 특히 노인을 봉양하는데 있어 필요하다고 여겼다. 실제로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마시는 도소주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장수하는 데 약이 된다고 했다. 또한 정월대보름 아침에 귀밝이술이라 불리는 이명주, 즉 청주를 차게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운 점이 있는 만큼 절제와 예절이 따라야 하는 것이 또한 술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로 흥하고, 술로 망하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술을 남용하거나 무절제하게 다루면 만남 자체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율곡 이이도 ‘잔치를 하며 술을 마실 때에는 빠지도록 취해서는 안 되고, 술기운이 무젖으면 그만 마시는 것이 옳다.’(「격몽요결」 〈지신장〉)고 했던 것이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해서 미치게 하는 약이라는 뜻으로 광약(狂藥)이라 불리기도 했다. 따라서 음주에 있어서는 절제와 예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윗사람에게 공경의 예를 갖추고, 타인에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 음주의 예절이었던 것이다. 이를 주례라 일컬었다. 「동국세시기」 〈3월〉에 소개한 향음주례(鄕飮酒禮)가 그 좋은 예다. 봄과 가을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충과 효를 비롯한 사람의 도리에 관한 향약을 낭독하고, 이어 어른들에게 술을 대접하며 잔치를 벌였다. 예의를 갖춰 절도 있게 술잔을 올림으로써 연장자를 존중하고, 덕이 있는 이를 높이는 잔치였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흔히 우리 민족은 제천의례에서 보듯이 고대부터 음주가무를 즐겨왔으므로 유흥에 남다른 기질을 보이고 있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원초적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섬겨왔으며, 신중하고도 간절하게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신과 인간의 만남에 정성을 기울여왔으며, 여느 민족보다 종교심성이 깊었다는 방증인 것이다. 한국천주교회가 선교사가 아닌 이 땅의 평신도들의 손에 의해 자생적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제천의례의 음주가무 전통이 우리 신앙선조들의 신심으로 이어졌다고 하면 무리일까. 오늘날 가톨릭 가정에서의 음주는 곧 하느님의 축복을 나누는 음복이자 공동체의 일치를 지향하는 행위가 돼야 하는 까닭이다.

※이번 호로 연재가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집필해주신 김문태 교수님과 관심 있게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rn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