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농아선교회 설립 30주년 기념 일본 성지순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8-10-16 수정일 2018-10-17 발행일 2018-10-21 제 311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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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성지 안내 모두 수화로… 우리들만의 특별한 여행
장애인 22명·봉사자 17명 참가
순례지 상세 설명 수화로 전달
매일 새벽 미사 봉헌도 ‘감동’

“수화통역과 매일미사로 마음 벅찬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10월 1일 일본 나가사키. 성지를 향한 버스에 탄 신자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보통 성지순례라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나 묵주기도를 합송하는 소리로 차안이 가득 찼을 법하지만, 이 성지순례팀은 달랐다. 목소리 대신 손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순례길이었다. 한 손에 묵주를 든 신자들은 맨 앞줄에 서 있는 봉사자의 수화에 맞춰 나머지 한 손으로 수화를 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9월 29일~10월 3일 진행된 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산하 농아선교회(회장 최정수, 영성지도 박태웅 신부)의 일본 성지순례 모습이다.

설립 30주년 기념 일본성지순례 중 농아선교회 회원들이 나가사키 혼고우치성당 루르드 성모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농아선교회 제공

이번 일본 성지순례는 농아선교회 설립 30주년을 맞아 마련됐다. 청각장애인들은 국내에서도 성지순례를 하는데 불편이 있지만, 해외에서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제약으로 더 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해외 성지순례를 하기 어렵다. 이런 청각장애인들의 불편을 줄여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이번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이번 성지순례에는 영성지도 박태웅 신부를 비롯해 청각장애인 22명과 봉사자 17명이 함께했다. 청각장애인들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많은 봉사자들이 참가했다. 순례단은 히라도, 나가사키, 운젠에 걸쳐 일본의 성지들을 순례했다.

성지에 도착해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되자 수화통역을 맡은 봉사자들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청각장애인 신자들도 설명 하나라도 놓칠세라 봉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이번 순례에 참가한 청각장애인 중에는 사전에 방문한 성지에 관해 자료를 찾아본 이도, 이전에 순례한 경험이 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통역 받으면서 일본성지를 순례한 것은 처음이다. 국내 성지순례 중에는 성지에 관한 다양한 설명을 글로도 접할 수 있지만, 외국 성지의 경우 성지순례 안내 책자에 한국어 설명만으로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려웠다. 가이드의 상세한 설명을 수화통역 봉사자를 통해 전해들으면서 더 깊이 묵상하는 성지순례가 가능했다.

농아선교회 소속 최정수(베네딕토)씨는 “일본 천주교의 시작이 굉장히 오래됐고 잔인한 박해가 이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봉사자뿐만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성지순례를 하게 돼 나이든 신자들도 힘든 줄 모르고 순례에 함께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농아선교회 회원들이 일본성지순례 중 히라도 히모사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청각장애인 신자들에게 이번 성지순례에는 또 한 가지 특별함이 있었다. 바로 매일미사다. 박태웅 신부는 방문하는 성지의 성당에서, 또 성지의 성당에서 미사를 못 드릴 경우에는 매일 새벽 순례단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수화통역이 없으면 미사를 봉헌할 수 없는 청각장애인들은 그동안 수화통역 봉사자가 있는 본당에서 간신히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전부였다. 매일 미사를 드려본 적도 없거니와 새벽에 미사를 봉헌해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매일미사를 체험한 청각장애인들은 더욱 신앙의 기쁨 안에서 성지를 순례할 수 있었다.

이번 순례에 봉사자로 동행한 안민기(스테파노)씨는 “청각장애인 신자분들이 매일미사를 처음 경험하면서 놀라워하고 감명 받으시는 모습을 봤다”면서 “이번에 선교회에서 10월 말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선교회 간부들이 이번에도 새벽미사를 하자고 제안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고 했다.

해외를 갈 기회가 적은 청각장애인들에게 해외 성지순례는 설레는 일이었지만, 순례단은 순례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순례단은 성지순례 일정 중 매일 묵주기도 10단과 아침·저녁기도, 삼종기도를 바치면서 더 하느님과 함께하는 순례를 하고자 노력했다.

박태웅 신부는 성지순례를 떠나면서 “외국 여행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위해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기 위해 가는 것인 만큼 경건한 마음으로 임하자”고 당부하기도 했다.

순례단의 이런 모습은 성지순례 중 만난 현지인들에게 감명을 주기도 했다.

나가사키대교구 오우라본당 주임 쿠시 리츠오 신부는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한국의 신자들이 장애에도 불구하고 신심 깊게 순례하는 모습이 정말 성인 같다”고 말했다.

농아선교회 영성지도 박태웅 신부가 일본 운젠순교지의 순교비에서 기도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