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455) 사제란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8-10-09 수정일 2018-10-09 발행일 2018-10-14 제 3115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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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사제로 살면서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하고 있는 덩치는 큰, 마음씨 고운 후배 신부가 있습니다. 그 신부는 몸집만큼 마음이 넓어,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감동을 받는답니다. 얼마 전, 일이 있어서 외출했다가 그 신부 사무실 근처를 지나면서 불쑥 찾아가 차를 얻어 마신 적이 있습니다.

나를 보자 반겨주던 그 신부는 직접 산 원두콩을 스스로 볶아 내린 커피를 주었습니다. 후배 신부가 직접 볶고, 갈고, 내려준 커피라 그런지 커피 맛을 모르지만 나는 맛있게 마셨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하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후배 신부는 나에게 좀 기다려 달라 당부하더니, 20분 정도 밖에서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손님들이 가셨는지, 후배 신부는 맑은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에 들어왔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선약이 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러면 이 시간을 피해서 왔거나, 다음에 왔을 텐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후배 신부는

“아냐, 형. 선약은 없었어. 지금 이 사무실 근처에 우리 단체를 후원해 주는 여러 업체가 있는데 거기서 실무를 하는 분들이 있어. 그분들 중에서 아는 직원 3명이 점심 먹은 후, 무작정 나를 찾아온 거야. 가끔 여기저기, 나를 아는 사무 관련 직원분들이 점심 먹은 후 여기 놀러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곤 하거든.”

“그래? 네가 얼마나 좋으면 그러겠냐. 그런데 그분들은 여기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니?”

“방금 왔다 간 분들은 어제, 오늘 오전에 직장 상사랑 갈등이 있었나 봐. 그래서 직장 상사 뒷담화를 하다가 가셨어.”

“야, 재밌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일반 분들이 사제인 너를 찾아와서 직장 상사 뒷담화도 하고. 상황이 재미있네.”

“좀 전에 오신 분들은 가기 전에 내게 이런 말을 해 주고 갔어. ‘신부님 아니었으면, 오늘 오후에 사표를 썼을 텐데, 다시 마음잡고 사무실로 갑니다. 신부님, 그냥 고맙습니다.’ 헤헤. 요즘 나, 이렇게 살아.”

“그래, 그분들이 직장 상사 뒷담화를 하면, 너는 그분들에게 어떤 피드백을 주니?”

“피드백은 무슨. 그냥 그분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만 보는데. 그분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그저 듣고 있다가 추임새 정도만 하고. 그게 다야. 그런데 이런 내 모습이 좋은가봐.”

신학교를 다닐 적에 사제 수업을 받을 때마다 ‘사제란?’ 이 물음에 많은 고민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의 삶을 배우면서 ‘사제란 누군가의 필요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로 살아가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후배 신부를 만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사제란’에 대한 물음에 또 하나의 묵상 거리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사제란 그냥 가만히 있어주는 사람.’ 사실 사제로 사는 동안 도움을 주는 사람의 역할을 하다 보니, 때로는 사제의 도움에 대한 도움을 받는 타인의 반응에 예민한 적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사제의 도움에 도움받는 타인이 적절한 반응을 하지 않으면, 도움은 주지만 서운한 마음이 든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제란 ‘그냥 있어주는 사람’의 역할만 묵묵하게 잘 할 수 있다면, 사제로 사는 동안 많은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듯합니다. 젊은 시절, 사제란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지만, 그날 이후 사제란 ‘그냥 있어주는 사람’이라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냥 있어주는 사람’의 역할, 생각해 보면 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삶인 것은 분명합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