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가난한 마음이 생명의 길이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입력일 2018-10-09 수정일 2018-10-09 발행일 2018-10-14 제 311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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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지혜 7,7-11)  제2독서(히브 4,12-13)  복음(마르 10,17-30)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이 땅에서 삶의 기쁨을 누리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연중 제28주일의 말씀을 통해 지상의 것과 천상의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소중한 지혜를 주십니다. 또한 나눔과 비움이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밝히십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지혜 7,7-11)에 솔로몬이 한밤중에 주님께 기도하니 지혜의 은총이 내립니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 열왕 3,5)고 물으셨을 때, 그는 자신의 건강과 재물이 아닌 ‘듣는 마음’과 ‘선과 악의 분별’을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시고 부와 명예는 덤으로 주십니다. 지혜의 빛을 입은 솔로몬은 지혜에 비기면 권좌, 재산, 보석, 건강, 미모 등은 하찮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알고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지혜는 바르게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에게 청하면 베풀어주십니다. 덧없는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영원하신 주님의 자애와 지혜를 입으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기쁨은 물론이요 후손들에게까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시편 90, 화답송)

제2독서(히브 4,12-13)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땅을 지배함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 내면의 생각과 속셈까지도 가려내시기에 모든 피조물은 그분 눈앞에 벌거숭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소중한 지혜가 담겨져 있기에 이에 대한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주님께 보답해 드리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와 부자 이야기’는 공관복음(마르 10,17-27, 마태 19,16-26, 루카 18,18-27)에 모두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가며 ‘선하신 스승님’이라 경의를 표한 그가 악의를 품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공개적으로 남을 칭찬하는 인사말은 상대방의 명예에 손상을 입히고 자신은 일어서려는 저의가 숨어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잘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하시며 겸손하게 대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로 가려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 횡령을 해서는 안 되며 부모를 공경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보셨습니다.(마르 10,21) 마르코 복음사가만이 이 표현을 쓰고 있는데, 유다사회에서 사랑은 말보다 실천을 중시합니다. 부자는 어려서부터 도덕적인 생활을 해왔기에 예수님의 관심을 얻어 제자가 되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시며,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라며 권고하십니다. ‘가진 것을 판다’는 것은 오늘날 서구사회처럼 주식을 팔고 은행구좌를 비우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 곧 가족, 주택, 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사도들처럼 혈연의 유대도 끊어야 하는 철저한 자기 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에서 가족과 혈연관계는 삶 자체에서 뗄 수 없는 필수조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는 사회적 자살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고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게 영예로운 일이며, 당장 보상을 받아야 만족하기에 주님을 따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을 위해 많은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인리히 호프만의 ‘그리스도와 부자청년’.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들짝 놀란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고 수군댑니다. 탐욕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은 낙타처럼 몸집이 크기에 바늘구멍 같은 ‘좁은 문’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 비움의 은총을 입으면 가능합니다.

유다인은 자녀들에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지혜가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해서도 큰 가르침을 줍니다. 부자에게 문제는 부의 소유가 아니라 탐욕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알고 보면 주님께서 물질적인 축복으로 주신 재화에 인간은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삶의 목적은 재물을 모으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알고 사랑과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뒤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더욱 가난해지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이 가난한 모습을 본받아 복음적 가난의 삶을 산 모범적인 분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부는 샘에서 솟는 물과 같아 자주 길을수록 더욱 깨끗해지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썩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마음의 가난을 깨달은 사람은 주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습니다. 누구나 벌거숭이로 세상에 왔다가 먼지로 돌아갑니다. 삶은 내적 태도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