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사)희망래일 인문학습원 ‘대륙학교’ - 러시아 연해주 탐방

연해주 우세민·박지순 semin@catimes.krrn사진 정다빈
입력일 2018-10-09 수정일 2018-10-09 발행일 2018-10-14 제 3115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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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넘어 동북아 평화 함께할 동반자 만나다
얼어붙은 척박한 땅 일구며 한민족의 얼 이어온 고려인들 역사 기억하며 후세에 전해
민족 동질성 회복 노력 절실

19세기 말 일제 억압을 피해 러시아 대륙에 이주했던 재외동포들. 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부르며 얼어붙은 땅에 정착했다. 비평화적 환경을 피해 연해주(프리모르스키)에 새 삶터를 잡았지만,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거듭된 억압 속에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은 척박한 땅을 일구고 한민족의 얼을 이어갔다. 특히 안중근(토마스)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연해주에서 조국 독립과 동북아 평화를 위해 혼을 불태웠다.

가톨릭신문은 (사)희망래일(이사장 이철)의 인문학습원 ‘대륙학교’(교장 정세현) 4기생들과 함께 10월 4~7일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의 흔적을 찾았다.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평화에 함께할 동반자인 그들을 통해 우리겨레가 할 일을 모색했다.

대륙학교 방문단이 10월 6일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비’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있다. 안중근 의사 등 12명의 독립투사들이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동맹을 결의한 것을 기리는 곳이다.

■ 한국인과 고려인의 해후

미세한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칼춤, 가슴을 뚫어주는 북 연주, 아름답고 화려한 부채춤…. 고려인 청소년 예술단 ‘아리랑 가무단’의 멋진 공연이 펼쳐졌다. 이곳은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고려인 문화회관). 우수리스크는 연해주에 살고 있는 4만여 명 고려인 중 2만여 명이 정착한 지역이다. 10월 5일 연해주 방문단은 고려인뿐 아니라 러시아인, 그 외 다른 소수민족들도 즐겨 찾는 소통과 친교의 장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에서 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자치회 김발레리아 부회장을 비롯한 고려인들과 감격스럽게 해후했다.

김발레리아 부회장은 “고려인들은 우수리스크에 사는 다양한 소수민족들 중에서도 모범적으로 성장해 우리민족의 얼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연해주 방문단과 고려인들은 150년 세월의 간격에 의한 언어 장벽으로 긴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각자의 가슴에 뜨겁게 울컥하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 질곡의 고려인 역사

러시아에 고려인이 이주한 것은 1864년 한인 농가 13호가 굶주림과 억압을 피해 이주한 것이 그 시작이다. 고려인들이 정착마을을 세운 연해주의 ‘지신허’와 ‘개척리’는 1937년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근거지가 됐다.

고려인 강제 이주는 1937년 스탈린정권에 의해 이뤄졌다. 고려인이 일본 첩자가 될 수 있다는 누명 때문이었다. 한인들은 목적지도 모르는 채 빈손으로 쫓기듯 굶주림과 공포뿐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탔다. 살아남은 고려인들 17만여 명이 막막한 중앙아시아 벌판에 내려졌다. 집단수용소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고려인들은 땅굴을 파 엄동설한을 견디고, 황무지를 개간했다.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던 시점인 1991년 이후에서야 4만 명가량이 다시 연해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평화의 꿈 흘려보낸 ‘슬픈 강’

연해주 방문단은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상설(1871∼1917년) 선생의 유허비를 찾았다. 유허비 옆에는 이 선생의 유해가 뿌려졌던 수이푼 강이 별칭 ‘슬픈 강’에 걸맞게 쓸쓸히 흐르고 있었다. 이 선생의 유해가 여기에 뿌려진 것은, 주변에서 유일하게 이 강이 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죽음 뒤에라도 고국으로 가고파 했던 고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상설 선생은 이준, 이위종 선생과 함께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한 인물이다. 국권 상실 뒤에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성명회’를 조직하고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는 등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과 연합국으로 동맹하면서 활동이 제한됐고, 1917년 3월 2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해주 방문단 박종하 간디고등학교 교사는 “언젠가 독립이 올 것이라 믿으며 이상설 선생의 유해를 수이푼 강으로 흘려보냈던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고 감상을 전했다.

■ ‘안중근 의사 단지(斷指) 동맹비’ 앞에서 역사를 바라보다

대륙학교 4기 연해주 연수 핵심 목적지 가운데 하나인 ‘안중근 의사 단지(斷指) 동맹비’에는 10월 6일 오후 2시경 도착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토마스)을 비롯해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명이 러시아 연해주 핫산 크라스키노(핫산군 크라스키노면에 해당) 마을에 모여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동맹을 결의했다.

2001년 10월 18일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러시아 정부의 협력을 얻어 ‘단지동맹유지’ 조형물을 세웠다. 잘린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을 형상화한 석조 조형물은 안중근 등 12인의 단지동맹 모습을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국 독립을 향한 결연한 일념은 109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인 양 생생하게 전해진다. 안중근이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불과 8개월 만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결행력에 전율이 느껴지기도 했다.

역사적 인물의 행적 중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말이 있다. 역사를 기록하고 후세 사람들이 그 역사를 기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하는 말이다. 드넓고 외로워 보이는 핫산 크라스키노 대지에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비가 세워져 있는 모습이 고맙고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대륙학교 4기 연해주 연수 참가자 30여 명은 안중근 의거 현장을 재현하듯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외쳤던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했다.

■ 조국 통일과 평화가 오늘 우리의 꿈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비는 지금의 자리에 정착하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2001년 처음 세워진 정확한 장소는 크라스키노 추카보노 천변이었다. 이후 상습침수와 러시아 정부의 국경관리정책 변경을 이유로 2006년 11월 19일, 2011년 8월 4일 두 차례 이전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비는 안중근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는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은 물론 동양 평화 실현을 위해 행한 역사와 이 역사를 후세에 전하는 데는 국경을 초월해 인류공영에 가치를 둔 수많은 이들의 헌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오로지 평화 실현을 위한 ‘의거’였다는 사실을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비를 바라보며 뚜렷이 재확인할 수 있었다.

대륙학교 4기 변해영(그레고리오·56) 부회장은 연해주 탐방을 마치고 “심장이 뛴다”며 “일제에 주권을 빼앗겼을 때 소원은 독립이었지만 지금의 소원은 조국 통일과 평화”라고 말했다.

■ 질곡의 역사 현장에 대륙철도가 지나길 기원하며

이제는 질곡의 역사를 지나 든든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고려인들. 연해주를 중심으로 농업을 발전시키면서 한국 문화를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한국과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대륙철도가 추진되고 있는 시점에서, 고려인들은 우리와 함께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평화에 앞장설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연수에 함께한 경기도 의정부교육지원청 윤계숙(데레사) 교육장은 “강제 이주 등 여러 고통스런 역사를 거쳐 떳떳하게 잘 살아가는 우리 민족들을 보며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고, 우리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교회와 우리사회, 학교 전체에서 해외 우리 민족과의 동질성 회복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10월 5일 한국에서 온 대륙학교 연해주 방문단을 만난 우수리스크 고려인 청소년 예술단 ‘아리랑 가무단’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해주 우세민·박지순 semin@catimes.krrn사진 정다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