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안개가 산다 / 한이나

한이나 (바울리나) 시인
입력일 2018-10-09 수정일 2018-10-09 발행일 2018-10-14 제 311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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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날아다닌다. 커다란 창 안에서 바라보는 대관령 황토 빛 밭 등성이와 숲의 솔향기 사이, 뭉쳤다가 흩어지고 다시 합쳐지는 안개는 새떼들의 휘몰아치는 군무와도 같다. 창문을 열면 달려들어 시린 안개다발을 가슴팍에 던지고 휙 도망가는….

나는 세상의 창 안쪽에 앉아, 두 눈으로 기를 쓰고 날갯짓하는 그들의 향방을 쫓고 있다. 날고 나는 날개 사이, 나서느냐 숨느냐의 절박 사이, 삶과 죽음의 얼음 사이를 본다.

삼태기를 뒤집어쓰고 안개 빛 구덩이에 뛰어들었던 한 사내의 허공에 그은 상처자국을 생각한다. 한참을 공포에 무릎 꿇리다가 한순간 우주 밖으로 사라졌을, 아련한 안개를 더듬어 눈동자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남배울 만큼을 더 배우고도 늘 허기졌을, 그리하여 이상에 목말랐을 그 사내. 깜깜하고 광포한 세상바람에 휩쓸려 꽃봉오리 피우지도 못한 채 흐린 세상을 건너 가셨다. 그 사내는 아버지. 처연함이 짙어져 산 그림자도 깊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 일찍 아버지나 어머니를 여윈 사람이라 했던가. 건강 운, 재물 운, 수명 운, 부모 운, 자식 운에 시절 운까지 더해져야 세상 갖춘마디의 삶일진대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진즉 운명에 순명해 버렸다.

있는 그대로 수렴하고, 놓아버리고, 기쁨과 고통마저 날마다 축제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고요의 한 가운데로 침잠해 들어가 말갛게 남아있는 보석 같은 생각만 건져올리려고 애쓴다. 뒤늦게 이즘 나이에는….

행복 연구자들은 사람이 물질을 구매할 때보다 경험을 구매할 때 더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옷이나 물건 구입보다 독서, 전시회, 공연, 영화, 여행 등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음이 더 오래 행복한 것이다.

시간의 굴렁쇠를 굴려 뒤돌아보니 한창 젊어 아이들 키우고, 일할 때를 혼자 감당한 후에도 비교적 열정적으로 살았다. 기쁨의 ‘강도’보다 짧은 마디 기쁨의 ‘빈도’를 늘이며 시간을 뛰었다. 어제보다 1㎜ 나은 오늘의 내가 되어 있기를 희망하며!

이 세상에 가장 기분 좋은 소리 세 개가 있다고 한다. 자식 입에 밥 넘어가는 소리, 글방에서 책 읽는 소리, 자기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이유가 자식을 살리고 지켜내려는 모성애, 부성애일 것이다.

우리 어버이의 어버이가 그랬듯 자식의 자식에게 대를 이어 무사히 생명의 씨앗 그 바통 넘겨주심을 감사한다. 때로는 안개주의보에 갇혀 한 치 앞 분간할 수 없는 순간이 올지라도….

하느님은 다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얘야,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단다. 뒤에서 내가 배경이 되어 줄게!”

‘사스레피나무가 새가 되어 날았다/ 새 울음소리가 천지 못으로 떠나고 있었다/ 몸속의 말/ 나무속에 서성이던/ 불씨를 꺼냈다/ 딴 세상 산 밖으로 날았다/ 천지의 파란 물빛 위를 지나/ 장백폭포를 지나/ 날개를 펴는, 반짝이는 비상/ 한 마리 새 저 사스레피나무/ 세상 끝을 향해 날아오르는 기쁨으로 헤어지자/ 사랑아’

-한이나 시인의 ‘사스레피나무 새’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이나 (바울리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