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행동으로 하는 기도 / 김민수 신부

김민수 신부 (서울 청담동본당 주임)
입력일 2018-10-09 수정일 2018-10-09 발행일 2018-10-14 제 311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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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블룸(1914~2003)은 대학 시절 의학도였을 때만 해도 무신론자였지만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극적인 회심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믿게 되고, 나중에 영국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가 무신론자로서 의사생활을 할 때 자기에게 검진받으러 온 환자를 성공과 부를 가져다주는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삶의 자세가 달라지면서 자신의 눈앞에 있는 환자를 세상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블룸 대주교에게는 10대 시절 알래스카 에스키모인들과 여름을 지낼 때 잊지 못할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본래 에스키모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전체성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도와 일 사이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당시 어린 블룸은 그곳에 고등학교를 세우는 일에 봉사활동에 참여했는데, 어느 날 하수도를 내기 위해 도랑을 파고 있었다. 얼어붙은 툰드라 세계에서 땅을 파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한 에스키모인이 다가와 한동안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한참 뒤에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너는 도랑을 파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구나.” 그 에스키모인은 격려 차원에서 그 말을 했을 뿐이지만, 블룸은 그의 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떤 누구도 관심을 기울여준 사람이 없었는데 그 에스키모인만이 관심을 보였다. 그 친구의 말 덕분에 블룸은 전력을 다해 팠다. 왜냐하면 땅을 한 삽씩 뜰 때마다 그것이 곧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 블룸 대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기도가 의미를 갖는 것은 삶이 동반될 때뿐이다. 삶이 뒤따르지 않고 기도와 삶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기도는 하느님께 시간을 드리면서 때때로 하느님께 올려 드리는 일종의 정중한 서정시가 되고 만다.” 우리의 일이, 우리의 삶이 곧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동으로 하는 기도’이다.

시인 고진하는 어느 글에서 젊을 때 신장이 다 망가져서 이십 년째 신장 투석을 하는 친구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에 가서 서너 시간씩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투석을 했다. 양팔을 걷어서 보여 주는데, 팔뚝에는 온통 바늘자국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얼마나 힘드냐고 위로를 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에겐 투석하는 시간이 미사를 드리는 시간인걸!”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뭉클한 전율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 오랜 고통의 순간들을 미사로 승화하다니! 이거야말로 행동으로 하는 기도가 아닌가.

그러나 가정과 사회 곳곳에서 일하며 활동하는 신앙인들이 과연 기도와 일의 조화를 이루며, 기도가 일상적인 삶과의 만남이 되고 있는가? 예전부터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개인주의화된 신앙과 영성, 성과 속의 이원화와 같은 신앙태도가 만연됨으로 인해 카멜레온과 같은 이중성을 띤 신앙인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 기도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신자로서 악 표양을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다. 기도가 삶과 행동으로 녹아들어가지 않고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기도가 삶과 행동으로 표출되려면 삶의 양식인 ‘문화’가 복음화되어야 한다.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고,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노동과 휴식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등등 모든 삶이 문화적으로 실천되고 있다. 따라서 기도는 사랑, 정의, 평화, 진리의 문화를 지향하게 한다. 결국, 행동으로 하는 기도는 ‘문화의 복음화’를 이루게 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할 것이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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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신부 (서울 청담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