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9·11과 9·19 사이에서 / 이원영

이원영 (프란치스코)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입력일 2018-09-18 수정일 2018-09-18 발행일 2018-09-23 제 311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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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1일은 17년 전, 빈 라덴이 이끌었던 이슬람 무장세력 알카에다의 조직원들이 비행기를 납치해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테러를 가한 끔찍한 기억이 있는 날이다. 그리고 9월 19일은 13년 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및 남북한이 북한의 핵문제 해결 방안에 합의한 날이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은 사실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당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ism)을 선언했으며, ‘일방주의’(Unilateralism)와 ‘예방전쟁’(Preventive War) 및 ‘선제공격’(Pre-emption)을 골자로 하는 ‘부시 독트린’(Bush Doctrine)을 발표했다. 북한은 테러 직후 테러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이 북한 자신을 향할 것을 방어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 등을 ‘악의 축’(Axis of Evil) 국가로 규정하고, 해당 국가들에 대해 정권 교체를 시도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실제로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북한은 2002년 12월, 핵시설 재가동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소위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됐다.

이렇게 되자 중국이 북미 간에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2003년 4월 제1차 6자 회담이 시작됐으며, 지루한 공방 끝에 2005년 9월 19일, ‘9·19 공동성명’이라는 합의안을 도출했다. 9·11 테러로 시작된 미국의 ‘일방주의’와 이에 대한 핵개발과 군사적 도발을 통한 북한의 저항이 결국 9·19 공동성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미국 재무부가 북한 돈세탁에 대해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 공동성명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작년 북미 관계가 최악의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던 때가 9·11의 시기라고 한다면, 올해 북미 정상회담을 했던 때는 9·19의 시기라고 할 수 있고, 이후 북핵 협상이 교착된 시기는 다시 9·19에서 9·11로 돌아갈 것이 우려됐다. 과거 6자 회담의 교착 상태 타개를 위해 우리가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200만kW 전력 공급을 제안했으며, 이에 북한은 6자 회담 복귀로 화답했다. 이번에도 우리의 특사단 방북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되면서 2차 북미 정상회담 논의가 되살아났다.

만일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비핵화와 종전선언, 나아가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로드맵에 대한 통 큰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합의가 불가역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불가역적 합의를 통해 9·11과 9·19 사이의 혼돈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말씀을 실현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원영 (프란치스코)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