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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살림 예찬 / 오세일 신부

오세일 신부 (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일 2018-09-18 수정일 2018-09-19 발행일 2018-09-23 제 311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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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같은 명절 때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결혼 후 한 평생 ‘살림’만 하셨지만, 큰 잔치를 기꺼이 며칠씩 준비하고 찾아온 손님들을 일일이 챙기며 먹을거리들을 기쁘게 나누시던 어머니는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을 가까이 비추어주는 일상생활 속의 숨은 성인이셨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뤄지던 근대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을 성공하고 발전하는 유일한 길로 여겨서 ‘집 안에서 살림하는 것’을 경시하기도 했습니다. 기실,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남편들은 밖에서 돈을 버는 직업에 종사하고 전업주부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들 돌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남자들은 집에서 살림하는 것은 돈이 되지 않기에 여성들만이 전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확연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2007년 말(가부장제의 상징이던) ‘호주법’이 폐지되면서, 여성들의 ‘살림’(가사노동)이 시장에서 돈으로 교환되는 가치는 아니지만, 가사 노동의 가치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남성들 역시 육아와 살림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 중요성을 인식해가고 있습니다. 사실 밥해주고 식솔들 돌봐주는 분이 단 하루라도 없으면, 그 집안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만 해도 살림의 중요성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겠지요.

사회학자로 살고 있는 제가 인생살이와 살림에 대해 조금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힘겹게 공부방을 운영할 때였습니다. 돈을 모금하러 돌아다니고 없는 형편으로 재정관리를 하던 것은 그닥 어렵지 않았지만, 하루 세끼 식사 준비를 하고 아이들 하나하나를 품고 ‘기를 살려주는’ 살림살이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공부 못 하고 말 안 듣는) 아이들과 놀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평신도 선생님들 덕에 ‘돈과 관리’보다 더 중요한 ‘진짜 살림’을 조금씩 배울 수 있었음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기실, ‘살림’의 어원은 ‘살다’라는 자동사가 아니라 ‘살리다’라는 타동사에서 옵니다. 자기만을 바라보며 살기 쉬운 오늘날 개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를 ‘살리는 일’(살림)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구원적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시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포용하시며 “보시니 좋았다!”라고 하시는 창조주의 마음은 ‘살림’ 정신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살림의 정신은 그 자체로 초월적인 지평과 맞닿아 있습니다. 오직 나만을 생각하는 좁은 마음의 지평을 넘어, 식구들 모두 - 나도 살리고 이웃도 살리고 우리 모두의 공동체를 살리고자 하는 ‘살림’의 마음 안에는 ‘소유와 경쟁’이 아니라 ‘존재와 포용’이라는 삶의 양식을 통해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와 놀라운 풍요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림살이는 결코 고상해 보이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온갖 어려운 일들을 품어 안는 고된 여정입니다. 그렇기에 ‘살림’을 온전히 살아가려면 현실 안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내적 투쟁을 감내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 교육에 막대한 돈을 투자한다 해도, 부모의 기대치로 자녀의 기를 꺾고 있다면, 그것은 ‘비뚤어진 집착’일 뿐 살림이 아닙니다. 사업을 하며 경기가 불확실하다고 가난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최저 임금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면, 그것은 ‘불안감’일 뿐 살림이 아닙니다. 교회건축기금을 신자들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만 신자의 아픔을 헤어라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사목’이 아닙니다! 부동산으로 고수익을 추구하면서 임대료 인상만 요구한다면, ‘돈놀이’(재테크)만 있을 뿐 살림은 없습니다. 분열과 단절을 조장하는 이념에 빠져, 남과 북 서로가 더 큰 우리로 화해하고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길을 거부한다면, 이 땅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의 물꼬를 트는 ‘살림’은 저 멀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살림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남들보다 위로 올라가려는 ‘사닥다리’를 걷어찰 수 있는 용기와, 있는 그대로 부족한 자기와 이웃,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맛들일 수 있는 은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세일 신부 (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