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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성월 특집] 순교자의 어머니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8-09-04 수정일 2018-09-05 발행일 2018-09-09 제 3111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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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붙이를 잃은 처절한 고통 삭이며
자식 향한 모정까지 하느님께 봉헌
 형벌에 마음이 약해진 아들에게 “배교말라” 이야기하며 신앙 굳건히
 인간적 사랑 뛰어넘는 믿음 보여줘

성모 마리아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받았던 슬픔과 고통, 즉 성모통고(聖母痛苦)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서 절정에 달한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고통은 자신이 죽는 것과도 같은 비통함과 처절함이었지만 성모 마리아는 이를 하느님께 깊이 의탁했다.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도 피붙이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강인한 믿음을 보였던 어머니들을 볼 수 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신앙 선조들의 어머니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순교 신앙을 되새겨본다.

■ 하느님 법에 어긋나는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Gouvea, Alexander de, 1751~1808)는 쓰촨 대리 감목인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한을 통해 조선의 윤지충(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워 버린 폐제분주(廢祭焚主)사건을 자세하게 밝힌다. 특히 윤지충이 친척들과 친지들에게 했던 발언을 소개하면서 어머니 안동 권씨의 유언을 드러내고 있다.

“천주교 신자이셨던 저희 어머니께서는 저희에게 신신당부하시기를, 당신의 장례를 치를 때는 미신적이거나 하느님 법에 어긋나는 의식은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저희는 조상들 신주를 감춘 것이 아닙니다. 신주를 태워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유교식 조상제사를 거부할 수 있었던 배경에 윤지충 어머니이자 권상연 고모였던 안동 권씨의 의지가 영향을 미쳤음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안동 권씨는 1724년 태어나 1791년 사망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라도 진산의 양반 가문 출신 윤경과 혼인해 윤지충을 낳았다. 세례는 윤지충의 입교 후 자연스럽게 이뤄졌을 것이다.

당시는 유교 이념이 국가의 지배 사상으로 절정을 이뤘던 때였다. 그 시대에 양반가 여성으로 살았던 그가 윤지충이 유교식 조상제사를 거부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를 리 없었다. 유언으로 유교식 상례와 제례 거부의 뜻을 남겼다는 것은 유교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깨는 것이었고, 이미 아들에게 닥칠 세상의 화를 각오한 것이었다. 자신이 받아들인 신앙 안에서 부모와 자식이라는 혈연관계를 떠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 후 윤지충과 권상연은 순교의 칼을 받았고 한국교회 첫 순교자가 됐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 반열에 올랐다.

「안동 권씨 부인의 유교식 조상제사 거부」 논문을 쓴 김수태(안드레아) 충남대 교수는 이에 대해 “현세에서의 모자 관계라는 단순한 인연이 아니라, 내세인 천국에서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예수와 한 형제와 자매라는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영원히 함께하기를 지향한 것”이라고 평했다.

■ 모든 것은 천주를 위해서

한국교회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는 1846년 8월 26일 감옥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슬픔에 잠긴 어머니를 잘 위로해 달라’는 사연이다. 남편 성 김제준(이냐시오, 1796~1839)을 박해의 광풍 속에 이미 떠나보내고, 사제로 돌아온 맏아들마저 감옥에 갇혀 있는 모친의 처지에 대한 걱정이 담겼다.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1798~1864)는 김제준과 결혼해 1821년 8월 21일 김대건 신부를 첫아들로 낳았다. 겸손하고 열심한 신자였던 그는 박해를 피해 피난살이를 하며 또 남편의 공소회장직을 보필하며 신앙을 이어갔다. 신학생에 선발된 큰아들을 15세 어린 나이에 이역만리 먼 나라로 떠나보내야 했지만 ‘모두 천주를 공경해 받들려는 까닭’이라는 남편의 뜻에 함께했을 것이다.

그의 삶은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산했다. 아들의 유학 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남편은 참수를 당하고 시부모인 김택현도 매를 맞은 장독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정이 풍비박산 나면서 일정한 거처도 없이 구걸하며 떠돌았다.

1846년 4월 12일은 그간의 온갖 고통과 서러움을 잊게 해주는 날이었다. 사제가 돼 돌아온 아들과 10년 만에 상봉하면서 주님 부활 대축일을 함께 지내는 기쁨을 누렸기 때문이다. 「용인천주교회사」는 “반갑고 슬픈 눈물이 피차의 앞을 가리었고 몹시 가슴이 아팠다”고 당시 광경을 전하고 있다.

두 모자의 상봉은 길지 않았다. 얼마 뒤 동료들의 입국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떠났던 김 신부는 체포됐고 몇 달 후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바라봐야 했던 성모 마리아처럼 고 우르술라는 아들의 죽음을 고통스럽게 가슴에 심어야 했다. 작은아들 란식과 어렵게 살던 그는 66세 나이로 1864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김 신부가 묻혀있는 미리내성지에 안장돼 있다. 하느님의 길을 가는 아들을 위해 보고 싶어도 마음 안에 담고 참아내야만 했던 전형적인 어머니였다.

미리내성지에 안장된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 묘소. 출처 미리내성지 홈페이지

■ 옥중에서 보여준 모성애

절두산순교성지 복자 강완숙 골롬바 초상화.

우리나라 최초의 여회장 복자 강완숙(골룸바, 1761~1801)의 모성은 안동 권씨나 고 우르술라의 사례와는 다소 결이 다른 어머니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앞의 두 사람이 자신이 낳은 혈육에게 신앙 안의 모정을 보였다면, 강완숙은 남편 홍지영의 전처 소생이었던 복자 홍필주(필립보, 1774~1801)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영적인 모성을 드러냈다. 자신이 이해한 교리를 홍필주에게 가르쳐 주었고, 홍필주는 또한 강완숙의 열심한 신앙생활을 모범 삼았다.

신유박해 때 체포된 홍필주가 혹독한 형벌에 마음이 약해지자 강완숙이 했던 말은 유명하다. “필립보야, 너는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 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릇된 길을 가려고 하느냐?” 이 말에 홍필주는 마음을 돌이켜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했다.

‘순교자학교’를 상설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는 이상규 신부(대전교구 정하상교육회관 관장)는 “강완숙이 보인 모성은 신앙으로 낳은 모성이었다”며 “성모님과 예수님처럼 하느님 뜻에 따라 맺어진 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아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나라’라는 복음적 지평 안에서 육정(肉情)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계의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다.

심순화 작가의 복자 이성례 마리아.

가경자 최양업 신부 어머니 복자 이성례(마리아, 1801~1840) 역시 모정까지 하느님께 봉헌한 사례다. 곤장과 칼날에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던 그였지만, 자식 앞에서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다가 회심 후 순교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처형장에는 나오지 말라”고 명한 후 흔연히 순교의 길로 나섰다. 고아로 남게 될 자녀들을 보고 또다시 마음이 흔들릴까 걱정돼서였다. 살붙이에 대한 애정을 넘어서는 모습이다.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떨어지지 말아라”는 말이 마지막 당부였다.

이런 신앙 선조 어머니들의 면모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참 신앙의 의미뿐만 아니라 모성이라는 강한 본성까지도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믿음의 의미를 생각게 한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