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순교자의 믿음을 따라서…

류근숙(유스티나·청주 금천동본당)
입력일 2018-08-28 수정일 2018-08-28 발행일 2018-09-02 제 311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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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

이 말씀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생전에 한국천주교회 103위 시복시성을 위해 한국에 오셨을 때 비행기에서 내려 첫발을 내딛는 순간 엎드려 땅에 입 맞추며 하신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교황님의 그 모습을 되새기며 우리 부부는 희망과 열정을 갖고 전국 성지 순례를 결심했습니다. 12만㎞의 주행거리를 기록으로 남기며 제주교구 추자도 순례를 끝으로 전국 111곳의 순례를 마쳤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몇 곳을 짚어 보려 합니다.

무명 순교자들의 묘 앞에는 이름 석자도 남기지 않은, 오직 주님이 아시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그들의 삶과 집터만 있을 뿐. 그리고 그곳에 잠든 외방 사제 선교사의 얼을 만나게 된 때 우리 부부는 머리 숙여 한참이나 침묵 중에 기도했습니다. 장하도다. 님들의 넋이여!

부산교구 죽림골을 찾아 오를 때에는 너무 힘들어 순례길에서 쓰러지다시피 누워 쉰 적도 있었습니다. 너무 깊은 산중이라 산짐승이라도 나올 것 같은 곳인데 같이 걷던 남편 야곱이 지쳐가는 저를 보고 놀려 주려고 숨어 버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울어 버릴 것 같은 공포감에 휩싸이기도 한 추억도 있습니다.

춘천교구 금광리공소에 당도했을 때는 소나기가 우리를 반겨 주었는데 기쁨도 잠시, 열리지 않는 문을 간신히 열고 만나 뵌 것은 차가운 마루방에 있는 단출한 제대와 빛바랜 성상들! 그 앞에서 송구스런 맘과 부족한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원주교구의 배론성지 순례 때의 일입니다. 둘째 요한의 취업 면접날, 우리는 이곳에서 ‘실시간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들의 신바람 나는 답변이 전화로 전해졌습니다. 실시간기도는 우리 부부가 붙인 이름으로 하느님께 자비를 청해야 하는 일이 있는 그때 그 순간에 우리가 함께 깨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지에서의 실시간기도는 더욱 큰 은총임을 느꼈습니다.

의정부교구 마재성당은 미사 전에 성체현시와 조배의 시간을 갖고 미사를 집전하실 신부님께서 맨 앞에 앉아 묵상하는 거룩한 분위기가 참으로 감미로웠고 “영혼의 면역력은 성체와 말씀, 영혼의 씻음은 고해성사, 영혼의 비타민은 기도와 자선”이라는 그날 신부님의 강론 또한 마음에 담아왔습니다.

끝으로 제주교구는 추자도 순례가 난제였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노력에도 열리지 않던 뱃길이 지난 1월 마침내 길을 허락해주었습니다. 그날 추자도 파견미사에서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와 생이별을 하여 추자도에 남겨진 황경환의 생애와 모자간의 칠흙 같은 삶을 돌아보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고 하느님 안에서만 위로를 청했을 그들의 삶을 묵상했습니다.

순례를 마치며 느끼는 것은 우리 조국의 땅, 우리의 발밑에는 전 영토를 걸쳐 순교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거름 되어 흐르며, 이것이 한국천주교회의 생명을 지켜온 것이고, 앞으로도 순례를 통한 우리 신앙은 나날이 견고해져 성교회의 생명을 영원히 지켜갈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 이 땅에 태어나 살게 해 주신 하느님, 감사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

류근숙(유스티나·청주 금천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