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나’로부터의 해방 / 김형태

김형태 (요한) 변호사
입력일 2018-08-28 수정일 2018-08-28 발행일 2018-09-02 제 311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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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마지막 무렵을 지켰던 신부님에 따르면 그 분은 다가오는 죽음을 많이 힘들어하셨다는군요.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음 앞에 고통받던 상황을 소개한 책을 열심히 보며 크게 공감하셨답니다.

“이런 허무가 있나. 내가 이런 무지의 세계로 가야 하나. 그것을 겪을 때는 ‘정말로 하느님이 없으신 것 같아. 배반하게 될 것 같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고독해 하고 힘들어하고 신앙적으로 좀 흔들리는 그런 말씀을 하시다가, 그다음에는 그런 말씀을 안 하시는 거죠. 그냥 기도하고….”

아니,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알고, 누구보다도 하느님 곁에 가까우리라 믿은 추기경님이 마지막 순간에 흔들리셨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기초를 놓은 칼 라너 신부의 ‘주의 기도’를 떠올렸습니다.

“제 마음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비록 제 마음이 지옥 같을지라도 아버지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시며, 말 대신 신음소리가 나오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소서. 모든 것이 우리를 버릴 때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마 추기경께서도 똑같이 기도하셨으리.

그분께서 ‘김수환’이라는 개체에 매여 그 개체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순간에는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온갖 회의와 허무한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왔을 겁니다. 그러다가도 ‘흙에서 나온 자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전체이신 당신의 말씀을 떠올리면 새삼 피조물의 처지를 받아들여 신앙을 돌이키셨겠지요.

불교 화엄사상에서는 세상 만물들을 ‘사’(事)라 하고, 사물들의 본성, 본체를 ‘리’(理)라 합니다. 이 ‘사(事)와 리(理)’는 서양 철학의 ‘개체와 전체’, ‘피조물과 하느님’에 대비됩니다.

화엄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물결과 바다에 빗댑니다.

너른 바다 저 물결은 잠시 바다 위로 솟구쳐 일렁이며 제가 물결임을 뽐내다가, 다시 스러져서 제가 나왔던 바다로 돌아갑니다.

사(事)요, 개체요, 피조물인 ‘나’는, 리(理)요, 전체요, 하느님이신 저 바다 위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잠시 이 세상에 나와 이런저런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짓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한때의 물결이었던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결과는 바다에 합쳐져 남아 있다가 다시 또 다른 물결로 일렁입니다.

모든 개체들이 저마다 바다 위 도드라진 물결임을 주장하다가도 결국에는 빠짐없이 한 바다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한 바다의 일부이니 저마다의 개성으로 저마다의 삶을 살아도, 그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비록 너와 내가 서로 다른 개체임이 분명할지라도, 너무 너와 나를 구별하며 나만이 세상의 중심인 양 내세우지 말진저.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 글은 이렇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라너 신부님은 ‘주의 기도’를 아버지의 자유와 생명 안에서 ‘나로부터의 해방’으로 요약합니다. 그 기도문의 나머지 부분은 이렇습니다.

“비록 땅에서는 서로 죽일지라도 아버지의 뜻은 생명이며, 땅에서는 생명의 끝처럼 보이는 것이 하늘에서는 당신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그리고 이 양식을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나누지 않거나 배가 불러 나 자신이 가련한 피조물임을 잊지 않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시련 중에 죄와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하소서. 죄와 유혹은 결국 아버지를 믿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듣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풀어주시고 우리를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자유와 생명 안에서 해방하소서. 아멘”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 (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