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

[생태칼럼] (32) 생명의 길

박그림 (아우구스티노)rn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
입력일 2018-08-21 수정일 2018-08-21 발행일 2018-08-26 제 310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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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폭우로 삶은 지쳐가고 한여름의 짙푸른 숲조차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숲에 들어서면 나무들이 어깨를 겨루며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숲은 마음도 초록으로 물들이고, 바람이 불면 어느새 무더위는 사라지고 온몸이 나무가 돼 흔들린다. 느린 걸음으로 희미하게 와 닿는 생명의 흔적을 따라가면 생명의 길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느낌으로 가득해서 나를 이끌어 발걸음을 옮기게 한다.

야생동물의 발길에 쓰러진 풀줄기와 뜯어먹은 풀잎을 더듬고 발자국에 담긴 생명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같은 자리에서 숨결을 고르고 떠났을 생명을 떠올리며 그와 내가 함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깃들어 사는 생명들의 존재를 느끼고 그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때서야 비로소 숲은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생명을 품고 기르며 생명으로 살아나는 숲에서 나도 작은 생명으로 다른 생명의 존재를 바라보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려 애쓰게 된다.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와 이어지며 내 삶을 풍요롭게 때론 거칠게 몰아치면서 산은 스스로 나아가고 나는 작은 몸 얹어 짧은 삶을 이어갈 뿐이다. 때마다 숲속에 들어 삶은 풍요로워지고 가벼워져, 어느 날 가을 숲처럼 가벼워지면 숲에 스며들어 사라지리라.

생명의 길을 따라 사는 삶은 생명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뭇 생명과 더불어 산다. 그런 숲에서 생명의 흔적이 사라진다면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요즈음 설악산은 나날이 야위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듯 애처롭고 케이블카 설치문제로 시끄럽다. 그렇지 않아도 상처가 늘어나고 아픔이 가시지 않는 설악산이다. 깊이 패이고 넓혀진 산길을 올라 돌투성이로 바뀐 대청봉에 서면 설악산은 산이 아니라 아픔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설악산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고 아직도 아픔은 이어지고 있다. 뭇 생명들의 넉넉한 품이었던 설악산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일조차 힘겹게 여겨질 만큼 생명이 사라진 죽은 산으로 바뀌고 있지만, 설악산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에겐 케이블카 반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규제와 개혁의 대상일 뿐이다. 생명의 길은 뭇 생명과 더불어 우리들의 삶을 아름다운 세상으로 이끄는 길이다.

박그림 (아우구스티노)rn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