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평신도의 해, 나가이 박사를 그리며… / 오세일 신부

오세일 신부 (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일 2018-08-21 수정일 2018-08-21 발행일 2018-08-26 제 3109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뎅~ 뎅~ 뎅~”

원폭으로 폐허가 된 일본 나가사키의 1945년 성탄 전야 저녁 6시, 우라카미성당의 종이 울렸다. 나가이 박사와 그의 동료들이 폐허 속에 묻혀있던 성당의 종을 파내어 나무걸개에 걸어놓고 성탄 전야 기도 시간을 알렸던 것이다. 작지만 강한 일본 천주교회를 이끌어 온 평신도의 묵직한 힘이 세상에 힘차게 울려 펴졌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1908~1951)는 가톨릭 평신도이자 방사선 연구에 매진하며 인류애를 실천해 온 의사였을 뿐 아니라 본인도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로 살면서 죽기까지 그리스도교 신앙과 복음 정신을 나누는 집필 작업을 하여 ‘우라카미의 사도’로 불린다.

나가이 박사는 원래 무신론자인 의학도였지만, 7대째 ‘숨은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을 지켜 온 평신도 총회장(초카다)의 집에 하숙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얻고 그 집 딸 미도리와 결혼하였다. 젊은 나가이 박사가 백혈병 판정으로 남은 생이 2~3년이라는 선고를 받고 고통스럽게 아내에게 전하자, 미도리는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한참 흐느낀 후 말한다. “당신은 중요한 일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고 당신의 수고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어요.” 미도리의 눈물어린 진심을 듣고 나가이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 기쁘게 정진해 나갔다고 고백한다.

나가이 박사는 원폭 투하로 아내도 잃고 자신도 서서히 죽어가면서 어린 아들과 딸이 곧 부모를 일찍 여의게 될 설움을 생각하며 아래와 같이 글을 적어 나눈다. “너희의 설움이 올라올 때는 마음껏 울어라. 다만 하느님 앞에서 너희의 설움을 마음껏 내어드리고 울어라. 그분께서 참된 위로를 주시고 너희의 눈물을 닦아주시리니.” 죽어가는 부모의 심정에서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본인이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나눠줄 수 있는 위로와 희망이 ‘진복팔단’이었음을 깨닫고 실천하는 이 평신도의 모습에서 나는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나가이 박사 같은 절절한 신앙고백을 하며 살고 있는가? 요즘 한국의 젊은 가톨릭신자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아이가 크면 스스로 종교를 ‘선택’하도록 배려한다”는 입장에서 세례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 기실, 아이는 자기의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도 부모들의 바람과 기대에 맞추어 살도록 평생 기싸움을 하며 살면서~ 종교에 대해서만은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인가? 우리 신앙은 단순한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생명을 거저 주시고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는 그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축복인 줄을 미처 맛들이지 못 했기 때문이리라.

어찌 보면, 우리 교회의 탓도 없지 않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먼저 나누기보다는 ‘주일미사 빠지면 죄. ○○하면 죄…’, ‘죄와 금지’의 부정적 언어를 주입하며 외면적인 성사생활만을 강조해왔으니! 우리 교회의 사목 관행에도 뼈저린 각성과 근본적 개선이 절박하다(semper reformanda). 사랑과 은총, 진정성 있는 알맹이를 신앙의 형식보다 앞서 나눌 수 있도록 말이다.

올해 교회는 ‘평신도의 해’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나가이 박사와 같이 심신 깊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무척 많았다. 그분들은 성직자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목숨을 다해 천주님을 공경하고 증거 하는 놀라운 리더십을 나눠오셨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평신도 리더들의 역할이 ‘사제의 하수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크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모두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함을 증거 하는 소명을 동일하게 받는다고 강조하신다. 세상 한복판에서 고군분투하며 복음을 살아가는 ‘평신도의 소명’ 역시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여정임을 우리 사제들은 머리 숙여 존중해야 한다.

지난여름 일본 성지순례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나가이 박사의 전기를 담은 책 「나가사키의 노래」를 알려주고, 회심의 기쁨을 나누며 동반해 주신 베로니카 선생님의 덕이 무척 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다하는 평신도로부터 우리 사제들도 거룩함에로의 더 깊은 초대를 받는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세일 신부 (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