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8) 조부모의 내리사랑, 자손의 치사랑 (상)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rn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
입력일 2018-08-13 수정일 2018-08-14 발행일 2018-08-19 제 310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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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과 다르지 않아
제사는 조상 은혜에 감사하고 그들을 기리는 정성
의례 줄면서 조부모·부모와 소통하는 노력도 줄어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평소 거처할 때에는 그 공경을 극진히 하고, 봉양할 때에는 그 즐거움을 극진히 하고, 병환에는 그 근심을 극진히 하고, 초상에는 그 슬픔을 극진히 하고, 제사에는 그 엄숙함을 극진히 한다.’(「소학」〈내편〉)

조상제사는 세상을 떠난 부모를 비롯한 선조를 기리는 의례다. 유교의 이념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의 제사는 효심을 지속하는 데 그 뜻이 있었다. 즉 자신이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고자 하는 추원보본의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자손이 선조를 살아있을 때처럼 모신다는 뜻으로 ‘사여생(事如生)’이라 칭해졌다. 제사상에 조상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올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생선의 경우 서해안에서는 조기나 홍어를, 남해안에서는 고래나 상어를, 동해안에서는 문어를 올리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제사는 향을 피워 혼(魂)을 부르고 술을 부어 백(魄)을 부르는 강신의식으로 시작한다. 이어 술을 올리는 초헌·아헌·종헌, 제물을 권하는 축(祝), 제물을 들도록 잠시 문을 닫는 합문(闔門)과 유식(侑食), 차나 숭늉을 올리는 헌다(獻茶), 작별인사를 하는 사신, 제사에 참석한 이들이 음식을 나누는 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조상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들을 기리고자 하는 정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사는 세상을 떠난 조상과 살아있는 자손이 소통하는 의례다. 조상제사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천주교의 제4계명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죽은 이에 대한 이러한 공경은 비단 자신의 조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음력 9월 9일 중구절에 가족이 함께 산에 가서 즐기다 오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은 우선 국화주에 국화전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떡 본 김에 제사 드린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놀라운 것은 그때 누군지 모르는 객사한 원혼들도 함께 흠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귀하게 마련한 음식을 자신의 조상뿐만 아니라 불쌍하게 죽어 제사상조차 받을 수 없는 망자들을 위해 내놓았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지녔던 이들이 이웃을 어떻게 대하였을까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천주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이러한 제사의 의미를 곡해했다. 1784년에 이승훈 베드로가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주며 사제직분을 대행했다. 이 사실을 안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1790년 윤유일 바오로를 통해 조선의 가성직제도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우상숭배의 우려가 있는 조상제사를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전라도 진산군에 살던 윤지충 바오로는 모친상을 당하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랐다. 그는 정약종의 외사촌으로 신심이 깊었으므로 교회의 방침에 따랐던 것이다. 그의 외사촌 권상연 야고보도 그에 동조했다. 이른바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른 폐제분주로 인한 신해진산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이를 안 유림들은 천주교인을 어버이도 모르고 군주도 모르는 무부무군의 난적으로 낙인찍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791년 12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을 불효 불충의 죄목으로 참수형에 처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백여 년에 걸쳐 만여 명이 넘는 순교자가 배출됐다.

비오 12세 교황은 1939년 12월 8일 ‘중국 예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조상제사가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조상에 대한 효심으로 행해지는 유교식 제사가 그리스도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교서였다. 어버이를 사후까지 지극하게 섬기고자 한 제사의 참뜻이 십계명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만천하에 공표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참혹한 박해의 구실이 됐던 제사가 이 땅의 가톨릭 가정에서 다시 거행될 수 있게 됐다.

오늘날 부모와 조부모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 얼마나 될까. 명절날 아침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가톨릭 신자들은 이제 선조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위령미사뿐만 아니라 제사나 차례를 지내도 되는 시절이 됐다. 그러나 조상의 기일 밤, 또는 설날이나 추석날 아침에 온 가족이 모여 제사는 아니더라도 촛불만이라도 켜놓고 위령기도를 드리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처럼 선조를 기리는 의례가 잊혀감에 따라 생명을 전해주고 양육해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그들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도 점차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되새기게 된다. 아니, 그에 앞서 지금 살아있는 부모와 조부모에게 감사하며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고,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가 되는 조상제사가 오늘도 새로운 까닭이다.

(다음 호에 계속)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rn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