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rn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입력일 2018-08-07 수정일 2018-08-08 발행일 2018-08-12 제 310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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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제1독서 1열왕 19,4-8)  (제2독서 에페 4,30-5,2)  (복음 요한 6,41-51)
당신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틴토레토의 ‘천사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엘리야’

폭염에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가끔 지쳐서 힘이 빠질 때, 오늘의 예수님 마음을 떠올리곤 합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외치시던 예수님의 외로운 표정을 그려봅니다. 진리 선포에 귀를 닫고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며 돌아서는 수많은 사람의 뒷모습을 보시며 우리 주님, 정말 외로우셨을 테니까요.

당신을 믿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살아가는 내 안에서, 지금 그분의 심정은 어떠실지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주님이 주시는 참 생명의 풍성함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땅에서의 재물과 능력과 건강이 뒷받침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일쑤이니까요. 그날 그분을 따르다 쌀쌀맞게 돌아섰던 군중들처럼 영원한 생명의 풍성함을 흘려들으며 땅에서의 풍요만을 갈구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니까요. 이렇게 당신을 외롭고 힘들게 하는 일들을 많이 저지르는 우리네 형편이 죄송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더욱 오늘 에페소 신자들에게 적어 보낸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마음이 젖어듭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는 독서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철저히 살아낸 후에도 세상을 두려워했던 엘리야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죽기를 간청했던 그 외로움을 감지합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때문에 많이 외롭더라도, 혹여 세상이 우리 심사를 심히 괴롭히고 우리 눈앞을 캄캄하게 할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아도 괜찮다는 이르심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유혹도 이겨낼 것을 약속하신 주님께 당신이 원하신 대로 사용하라고 자신을 내어 드린 존재임을 잊지 말아달라는 애틋한 당부는 아닐까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오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늘 승리하는 분이심을 잊지 말라는 호소는 아닐까요?

솔직히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사랑과 용서일 것입니다. 강론의 주제에서 이렇게 사랑과 용서가 수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아무리 강조해도 실천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콕 집어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용서해야만 합당하게 봉헌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을 것도 같습니다.

이웃을 용서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는 이 뚜렷한 선포를 어찌 들으시는지요? 그만큼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 필수라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신지요?

성경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알려줍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용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역할까지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용서야말로 하느님의 정의를 이 땅에 꽃피게 하는 첫걸음임을 밝힙니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더욱이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용서라니…… 손해가 막심할 것 같습니다. 아니, 분명히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용서의 원칙을 밝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용서가 힘들 때마다 전혀 용서를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를 먼저 용서해주신 주님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우리의 잘못 이전부터 벌써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명심하라는 얘기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에 벌써 예수님께서는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철저한 사랑에 기반을 둡니다. 상대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억울해질 각오를 갖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의 폭이 끝없으니 그리스도인은 늘, 언제나, 항상, 끊임없이, 이 마음을 잃지 않도록 애를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용서가 귀하고도 중요한 것은 우리를 가둬두고 있는 과거를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도록 해 주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바오로 사도는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용서의 삶을 오해하고 살아가니 딱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면 모든 일이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으로 여기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라는 말씀에 이어 곧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신다는 점을 도외시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매일 신앙 고백을 바치면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세상의 판단에 얽히고설키어 지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생명의 말씀을 믿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고귀한 당신의 살과 피를 공급받았음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진리를 깨달아 선포하는 하늘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삶이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땅에서의 삶 이후에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의 행색을 살피면 그날 주님의 말씀을 명확히 깨닫지 못하고 등을 보였던 유다인들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미사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거룩한 존재로 변화된 사실을 잊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어렵다하고 ‘어찌 그럴 수가’라며 반신반의하기에 그렇습니다. 어려운 진리라며 외면하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자리였던 최후의 만찬에서 다시, 거듭, 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이해와 별개이며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곧이곧대로 이루어질 진리임을 명심하도록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매일 이 순간에 집중하도록 하여 이 땅에서 영원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수많은 성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깊고 넓은 향기를 지니는 이유일 터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많고 해석도 다양한 삶의 정답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있습니다.

오늘도 세상 모든 문제의 열쇠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당신과 하나 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알리고 이루고자 하십니다. 진정한 삶의 축복을 선물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생명의 빵으로 배불린 우리들이 그 열쇠로 세상을 살리기를 참으로 기대하며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방법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지닌 이 작은 사랑과 굳센 믿음이 세상을 살리는 예수님의 밑천입니다. 아무리 덥고 지치더라도 부디 내 안에 모신 주님을 외롭게 하지 맙시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rn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