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서쪽의 노을 / 김길나

김길나(베로니카) 시인
입력일 2018-08-07 수정일 2018-08-07 발행일 2018-08-12 제 3107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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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연일 폭염경보가 발령될 만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111년 만에 찾아온 폭염답게 그 위력이 가히 재난 급이어서 여름을 지내기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름을 애호하는 ‘여름 찬양자’가 있다. 바로 나무들이다. 땅에 자신의 근원을 묻은 나무들은 불볕에 달군 생명의 환희를 꽃으로 피워내며, 겨울날의 죽음을 이겨내 넘어온 초록빛 승전가를 하늘로 퍼 올리고 있다.

우리네 인생의 계절에 있어서도 무르익은 젊음으로 초록을 빛내는 시절 또한 여름철이다. 이 시절에는 열정의 과잉으로 객기의 무모함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네 젊은 날의 여름은 은혜로워서 충만한 에너지로 사랑을 익히고, 흐르는 땀방울과 눈물의 힘으로는 고통까지도 삶의 자산이 되게 하며, 집중된 힘으로 성취를 이뤄가는 활력의 계절이다.

그러나 여름은 여름날의 추억을 남기고 생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지금 가을이 지나 겨울로 들어선 이 길목에서 나는 서쪽을 자주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얼마 전 서녘으로 난길을 걸어 문상을 다녀왔다. 병상에 있던 친구 부군이 치매까지 앓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혈액을 투석해야 하는 치매에 걸린 남편과 100세에 이른 시어머니를 집에 모시고 혼자 돌본 내 친구의 수고로움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 친구를 천사라고 호칭했다. 오랜 간병으로 지칠 대로 지치고 극도로 쇠진된 상태에서도 친구는 천사답게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버텨냈다. 그 정신력은 신앙의 힘에서 나왔다. 친구는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그 고난의 시간들을 봉헌했던 것이다.

그리고 올 때가 왔다. 친구가 남편을 보내야 할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긴급한 순간에 그가 거짓말처럼 명징한 의식으로 돌아와 있었다. 임종의 고통이 극에 다다른 와중에도 그동안 그녀를 고생시킨 일에 대해 그는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안아 달라”는 말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됐다. 사그라지는 기운을 남김없이 짜내 천 근 같은 무게로 엮어낸 말,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인 “사랑한다”는 그 말을 친구 가슴에 화살처럼 쏘아 박아놓고 그는 그렇게 떠났다. 문상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을이 슬프도록 붉었다. 죽음이 갈라놓은 이별의 울음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은 노을 아래에서 나는 그 노을 빛을 하염없이 바라 보았다.

그리고 노을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친구의 가슴에 꽂힌 순간의 화살처럼 그렇게 화살을 겨냥할 과녁이 어디 없을까?’ 물론 답은 나와 있었다. 그 과녁은 심장에 이미 화살이 꽂혀 있는 그리스도의 성심인 것이다. 사랑으로 피 흘리는 성심을 향한 화살이다.

화살기도는 힘이 세다. 빠르다. 분산되는 것이 아닌 응집력이 있다. 내가 화살기도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 기도가 분심 없이 할 수 있는 힘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맨눈으로도 보인다. 하루 중 가장 온화한 해가 서산마루를 넘어가는 게 보인다. 지는 해가 남긴 해의 온유함, 해의 그 고요한 평화가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이 저녁, 노을이 꽃빛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길나(베로니카)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