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칼도 못 꺼트린 기도회 촛불… 통일 밑거름 되다 -그뤼네스 반트 동·서독 갈랐던 비무장지대, 생명과 평화의 땅으로 탈바꿈 총 겨누던 곳에 산책길 조성 역사 현장 안내판 등 설치 -석방거래 서독 정부와 교회, 동독 지원 물질적 교류와 나눔 매개로 끊임없는 소통의 기회 다져 -평화기도회 동독 개신교 성 니콜라이교회 1982년부터 매주 평화기도회 동독 정부가 교회 탄압했지만 교회활동과 발언권 등 얻어내
70년 넘게 갈라져 지내온 북녘 땅은 또 230여 개 크고 작은 단위 지역으로 나눠져 있다. 북한 주민에게는 자신이 살던 곳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여행한다는 것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남녘 땅을 밟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반도와 같이 분단을 체험한 동·서독은 냉전이 격렬하던 1964년부터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유로이 오갔다. 비록 은퇴한 연금생활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4주간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고 체제나 이념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으로 평화를 한껏 누렸다. 그들이 쐰 평화의 바람은 훗날 통일 독일의 미래를 맞아온 마중물이 됐다.■ 죽음의 선에서 생명의 선으로… ‘그뤼네스 반트’를 찾아
무거운 구 동·서독 분단 역사를 따라가던 평화 순례단의 발걸음은 독일 중동부 튀링겐 주와 바이에른 주 경계에 있는 작은 마을 뫼들라로이트(Mödlareuth)에서 한동안 떠날 줄 몰랐다. 50가구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분단 시절,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독으로 갈라져 살아야 했다. 지척에 보이는 친척집을 방문하려면 개천 위 다리가 아니라 100㎞가 넘는 길을 돌아가야 했다. 5월 17일 순례단이 찾은 뫼들라로이트를 둘러싼 ‘그뤼네스 반트’(Grünes Band)에서는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풍력발전기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독일어로 ‘녹색 띠’라는 의미를 지닌 그뤼네스 반트는 과거 동·서독을 가르던 비무장지대(DMZ)와 같은 곳에 조성된 생태축. 서독으로의 탈출을 막으려고 설치한 철조망과 감시탑 등의 잔해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어 이곳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선(死線)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서를 나누던 분계선으로 인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이 지역 자연은 수십 년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번성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돼 멸종 위기에 처한 수많은 희귀 동·식물류 1000여 종이 서식하는 생명의 못자리가 됐다. 그뤼네스 반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과거 죽음의 선이었던 동·서독 군사분계선 지대가 화해와 평화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길이만, 한반도를 나누고 있는 DMZ 248㎞의 다섯 배가 훨씬 넘는 1393㎞에 달한다. 폭은 5~10㎞정도인 우리 DMZ에 비해 50m에서 가장 넓은 곳도 200m 정도밖에 안 돼 군사분계선 건너 마을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다. ‘철의 장막’으로 불리던 이곳이 오늘날 죽음의 전장에서 부활의 상징으로 거듭나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자연보호구역이 되기까지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한 많은 이들의 노력이 밑거름 됐다. 그뤼네스 반트가 평화의 기념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서가 아니다. 그뤼네스 반트는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인 1975년 7월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 소속 환경운동가들이 독일에서 가장 큰 환경단체 중 하나인 ‘분트’(Bund für Umwelt und Naturschutz Deutschland)를 창립하면서 이미 시작됐다. 분트는 1989년 12월 동·서독으로부터 모인 400명의 환경운동가들과 바이에른에서 첫 번째 독일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그뤼네스 반트’의 이름과 개념이 탄생했다. 분트는 그뤼네스 반트 프로젝트 일환으로 정부 등과 협력해 2007~2010년 사이 과거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모든 구간에 산책길을 조성해 누구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볼 수 있게 했다. 또, 1134㎞ 길이의 자전거 도로를 조성하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그뤼네스 반트를 관광자원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연령대별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생태 환경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또한 그뤼네스 반트를 끼고 있는 마을에서는 각종 전시회를 개최하고 안내소를 설치해 과거 아픈 역사와 함께 잘 보존된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관광상품 등을 마련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으로 과거 분단과 냉전의 상처로 얼룩졌던 땅은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생명과 평화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나아가 분트는 광범위한 현장조사와 홍보활동 등을 통해 철의 장막이 녹색 생명의 띠로 변했음을 널리 알려나갔다. 이런 활동은 유럽 전체로 파급돼 2003년 유럽 그린벨트 협력 사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독일 정부의 자연보존을 위한 정책들이 2010년 다른 여러 나라들에까지 확산되면서 자연보호를 위한 다양한 기관들이 생겨나는 결실을 맺었다. 이처럼 그뤼네스 반트의 변신은 한반도에도 DMZ를 통해 희망찬 미래가 열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중단 없는 나눔이 일군 화해·통일독일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