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백만 송이 장미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5-29 수정일 2018-05-29 발행일 2018-06-03 제 309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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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맛보게 되는 하느님 나라
참된 사랑은 ‘해야 하는’ 당위성 아닌 원함의 삶
하느님 모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본성이 곧 사랑

찬미 예수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원래는 구소련의 가요인데, 가수 심수봉씨가 직접 우리말 가사를 지어 붙였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좋아서 종종 찾아듣곤 합니다. 가사 첫 부분은 이렇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결국엔 사랑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지면을 통해 우리네 기도생활, 곧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만, 결국 그 핵심에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랑입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정말 여러 번 말씀드렸죠.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묵시록 22장 21절까지,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이면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럼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그 답을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찾습니다. 바리용 신부님의 글을 인용했던 것, 기억하시죠?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것이 베풂이다!-이요, 상대방에 의하여 산다는 것-이것이 받아들임이다!-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 안에서, 나를 위해, 나 자신에 의해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 전부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신비는 ‘내가 아닌 너를 향하는 전적인 움직임’입니다. 이 움직임은 자기 자신 안에는 도무지 머물러 있을 수 없고, 밖을 향해 퍼져나가야만 하는 움직입니다. 사랑이 원래 그러니까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온 우주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사랑 때문에 창조된 우리 인간이기에 우리의 본성 안에도 ‘내가 아닌 너를 향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도 사랑을 줄 때 더 아름답게 빛납니다.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렸던 ‘나중심’과 ‘너중심’의 움직임도 결국에는 사랑의 움직임입니다.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향하는 것이 사랑이니까요. 이처럼 너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삶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신 분이 누구시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당신의 존재 전체를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내어줌의 삶을 똑같이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온전히 너를 향해 움직이는 사랑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도 하느님을 따라 너를 향해 움직여갈 때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생긴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사랑’과 ‘의지’의 상관관계가 드러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약한 의지를 탓합니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하더라도, 금세 기도에 소홀한 자신을 보죠. 더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야지 하면서도 어느 틈엔가 다시 편안함을 찾고 안주하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의 약한 의지를 탓합니다. 흔히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이런 말씀들을 하시죠. “사랑의 감정은 결혼하고 나서 석 달이면 다 사라진다. 그때부터는 사랑이 아니라 의리로 살아가는 거다. 결국 사랑이 아니라 의지다.” 사실 이 말도, 예전에는 3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요즘에는 석 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자주 듣게 됩니다. 아무튼 이 말의 요점은, 우리의 의지로 애를 써서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의지에서부터 사랑이 우러나오는 것일까요?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의지에서 사랑이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부터 의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산악자전거 타는 취미를 가진 청년의 예도 그렇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애써 시간을 쪼개어 서로 만나고 또 돈을 아껴서 상대방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관상과 활동에 대해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참된 사랑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일부러 애를 써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삶이 아니라 ‘하고 싶다’는 원함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 뒤를 따르고 싶을 뿐입니다. 나중심에서 너중심으로 옮아가야 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옮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참 행복의 길이고, 그것이 곧 구원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야 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하고 싶어서 해나갈 때, 그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수고로움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지게 되는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마태 11,30 참조)

교회 안에서 ‘사랑의 박사’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도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규범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아우구스티누스, 「요한의 첫째 편지 해설」 7,8) 논어에서 이야기하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즉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더라도 절대 법도를 넘지 않았다’는 것도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선택, 이 행동이 너를 위해 이뤄지는 것일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게 되고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결국에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하느님 모상대로 지어진 우리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핵심이 너를 향한 움직임인 사랑에 있다는 것을 더 많이 깨달을수록,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피어나는 꽃’이 우리 일상 안에서 많이 피어날수록, 우리는 그립고 아름다운 본향에서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루카 17,20 참조)

우리네 기도의 삶, 곧 사랑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신 계명 그대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