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성서해설] 89. 예레미야서 1 / 김혜자 수녀

김혜자 수녀ㆍ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입력일 2018-05-24 수정일 2018-05-24 발행일 1985-11-24 제 148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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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예레미야 가장 참담했던 시기에 활동
고독한 예언자로 시련의 극에서도 성실
예언자중 유일한 독신-이사야와 쌍벽

I, 개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면서 가장 참담했던 시기에 활동한 인물 중 제일 두드러진 예언자를 만나는 장이다.

이제 그 예레미야를 통해 구원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초대에 보다 맞갖게 응답하기 위해서 새롭게 마음을 여미는 자세로 계시의 장을 대면하기로 하자.

1, 시대배경

스바니야서에 이미 만나본 시대상을 보충해보면 유다왕국으로서는 가장 어두운 시기로 멸망직전 40여년동안 다섯왕들이 교체되면서 그중 2왕은 타의로 3개월만 집권한것으로보아 그 혼란의 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열왕기下22~24).

이때는 요시아 왕 전 시대의 폐습이 잔존하여 야훼신앙이 박해의 위협에 시달리던 때였다. 요시아가 8세에 등극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섭정에 의해 10년간 다스려지다가 기원전 630년에 요시아는 대권을 잡고 태조 다윗의 정치를 답습하고자 노력한 현군이된다 (역대기 하 34,3). 그는 우상숭배를 근절시키는 일환으로 정화 사업을 실시했고 350여년 만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보수공사를 시도했다. 이 공사중에 법전을 발견하여 계획한 종교개혁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온 백성이 유일하신 야훼께 충성을 다하겠다는 계약갱신을 장엄하게 거행했다.

이때 발견된 법전은 신명기법전의 골자를 이루고 있어 계약갱신은 신명기의 주제인 하느님의 사랑과 계약에 성실하신 야훼를 그려 백성들의 불신을 깨우치고 있다. 요시아王의 이런 개혁운동은 그 불운한 시대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했던 예레미야의 생애와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그런데 요시아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을 위한 정치적 노력은 유다인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으나 불행히도 王이 609년 므기또에서 전사함으로써 부풀었던 희망은 물거품처럼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바빌론 세력이 구축되면서 유다에 가중되는 외세의 위협과 친에집트파와 친바빌론파로 대립되는 내적분열로 나라사정은 추풍에 떠는 낙엽의 신세였다. 설상가상으로 거짓 예언자들이 속출하여 예레미야의 망국의 예언에 따른 회개에로의 호소를 뒤엎어 야훼성전과 예루살렘이 영원하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혔고, 나아가 예언자를 박해하여 참 예자언가 딛고설 자리마저 앗아갔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내분은 심화되었고 에집트의 부추김에 놀아나 바빌론을 대적하면서 예언자의 태도를 매국노라고 낙인찍었다. 그러나 거짓예언자들의 감언이설에 놀아난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빌론으로의 처참한 유배 (587년)를 자초했을 뿐이다. 이 어둡기만 한 시공에서 예레미야의 활동이 펼쳐졌던 것이다.

2, 인물과 성품

이사야 보다 약 1세기 후에 불림을 받은 예레미야는 이사야와 쌍벽을 이루는 대예언자로서 자신의 온 생애를 걸어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부르짖었다.

「예레미야」란 『야훼께서 높게하신다』는 의미로서 고난의 길을 간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그는 므나쎄가 유다를 통치하던 650년경 예루살렘의 동북방에 위치한 베냐민의 땅「아나돗」에서 출생했다.「에비아달」의 후손으로 사제가문에 태어난 그는 명문에 태어났기 때문에 전통과 국가의 운명에 더 큰 관심과 책임을 가졌던 것으로 사료된다. 소명은 요시아王 제 13년(626년) 에 청년으로 불림을 받았고 망국의 한을 삼킬때까지 40여년간 동포들의 정신적 길잡이가 되어 자기 소신을 다하지만 죽음의 고통을 겪고 비극의 생을 마친 비탄의 예언자였다.

원래 천성이 온순한 예레미야는 평화를 사랑하여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였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이끌리어 예언자 중 홀로 독신의 생애를 마쳤다.

그는 죽음의 행군을 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로 불릴만큼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갔다. 시련의 극에 달했을 때 자기를 낳은 태까지 원망하는 속에서도 야훼의 성실을 저버리지 못하고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 (15, 10) 로 불릴만큼 자기사명에 성실했다. 이렇게 예언자들이 끌었던 원동력은 하느님이었고 그에게만 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을 거스르는 동포들에게 끌려가 에집트에서 돌에 맞아 순교했다는 히브리 전설이있다. 하느님과 동포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끝까지 말씀을 선포하는 사자로 만들었고 그들의 외고집에 부딪쳐 고독하게 죽어가야만 했다. 그로부터 600여년후 예수님이 자기백성의 외고집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난의 장들이 예레미야의 비탄의 삶안에 예표되어 나온다. (계속)

김혜자 수녀ㆍ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