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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5. 평화학과 그리스도인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8-04-03 수정일 2018-04-03 발행일 2018-04-08 제 308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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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유일한 잣대는 주님 말씀뿐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평화

그리스 아테네 인근 케피소스 강가에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라는 힘센 거인이 살고 있었다. 프로크루스테스란 이름은 ‘늘리는 자’란 뜻이다. 포세이돈의 아들인 그는 강변에서 여인숙을 운영했다. 여행에 지쳐 쉬고 싶은 이들을 유인해 쇠로 만든 침대에 묶어놓고는, 침대보다 키가 크면 머리나 다리를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작으면 잡아 늘려 죽였다. 프로크루스테스에게 침대는 편히 쉴 수 있는 도구가 아닌 끔찍한 사형대였던 셈이다.

잔혹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은, 미로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종말을 맞는다. 테세우스를 죽이려 했던 악당은 오히려 자신의 침대에 묶인 채 머리와 다리가 잘려 죽고 만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타인을 억지로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획일화 작업에 사용되는 폭력적 도구를 일컫는다. 이렇듯 어떤 한 가지 기준으로 모든 것을 다 그것에 꿰맞추려는 사람을 프로크루스테스라고 한다.

이 표현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적 사유 방식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다고 비꼬면서부터 널리 인용되기 시작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는 폭력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테세우스의 손에 자신이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 ‘프로크루스테스’가 만든 ‘침대’(기준)는 결국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기준’이 자신마저 파멸의 길로 이끄는 폭력임을 들려주고 있다. 아울러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받은 만큼 되갚는 동해복수(同害復讐)가 정의를 실현하는 길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오늘날에도 ‘현대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난무하고 있다.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영국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1899∼1992)는 저서 「치명적 자만」(The Fatal Conceit, 1988)에서 인간 사회에는 오랜 ‘잘못된 믿음’이 일으키는 ‘치명적’인 흐름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것을 ‘치명적 자만’이라고 불렀다.

인류 역사는 진리 또는 최고의 선이라고 여긴 사상과 이념, 제도가 오히려 인간 공동체를 더욱 피폐하게 만든 무수한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한 역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단적인 예가, 인간 집단지성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국가가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근대 이후 인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사상과 제도들이 모든 사람들이 풍요를 누리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내세웠다. 이런 믿음에서 생겨난 대표적인 사상이 사회주의다.

그렇다면 국가가 모든 이들이 평화를 누리는 이상사회를 디자인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 하이에크는 이러한 물음에 공동체를 원하는 대로 디자인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갖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가가 모든 것을 알고,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정직하지 못한 ‘지적 자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자만은 인류 역사에서 치명적인 결과로 드러났다. 평화로 포장된 수많은 사상과 이념 등은 잠시도 끊길 틈 없는 다툼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끝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가난과 폭정, 문명 파괴 등 폭력적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평화’를 내세운 결과가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 아이러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타인을 억지로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획일화 작업에 사용되는 폭력적 도구를 일컫는다. 인간 이성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잣대로 삼을 때 폭력을 극복하고 주님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 공유지의 비극 vs 사유화의 비극

자기 집 화장실과 공중화장실이 있다. 어느 쪽이 더 깨끗할까. 답은 자명하다. 자가용 자동차와 빌린 차가 있다. 어느 차가 더 깨끗할까. 답을 내놓기 쉽지 않다.

공중화장실과 렌터카. 둘 다 다수가 이용하는 대상인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답은 그것이 ‘공짜’인지 아닌지 여부에 달려있다. 별도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공짜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큼 빨리 손상되기 마련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고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개릿 하딘(Garrett Hardin) 교수(환경학과)가 1968년 과학 저널 <사이언스>지에 기고한 논문 ‘공유지의 비극’으로 유명해진 말이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풀밭(공유지)이 있다. 합리적인 목동이라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위해 가축 수를 늘리는 게 당연한 선택이다. 다른 목동들도 가축을 늘린다. 풀밭에 가축을 풀어놓음으로써 발생하는 이익은 목동들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하지만 인간이 욕심을 주체하기 힘들다는 데 비극의 씨앗이 담겨 있다. 목동들은 계속 가축 수를 늘리고 풀밭은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결국 풀밭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가축 수 때문에 모두가 함께 파멸하고 만다. 목동 개개인은 합리적 선택을 했지만 이러한 개인들의 죄의식 없는 행동이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 돌이키기 힘든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영역은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 가깝게는 환자들에 대한 과잉진료로 인한 건강보험의 질 저하, 남획으로 인한 어업자원 고갈, 해마다 반복되는 보도블록 교체 공사…. 눈을 돌려 세계를 바라보면, ‘기후변화에 관한 유엔 기본협약’(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UNFCCC)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인류가 지구촌이라는 ‘공유지’에 머무는 이웃이라는 점에서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기후변화협약도 공유지를 둘러싼 논쟁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전 인류가 이로 인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공유지의 비극’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유화의 비극’이라는 말도 생겼다. 주택을 수십 채씩 지닌 부자들에 대한 증세 문제가 대표적이다. 극단적인 사유화로 부의 편중과 양극화 현상이 심화돼 인류 공동의 자산이 공동선을 위해 쓰이지 못하고 낭비된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이나 ‘사유화의 비극’은 공통점이 있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합리적인 개인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에 매몰된 개인의 이익 추구는 결국 공동체나 다른 이들의 이익을 침해함으로써 어떠한 형태로든 폭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속적으로 ‘개인주의’를 비판하며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평화학과 그리스도인

폭력 극복을 목적으로 하는 평화학은 결국 극단적 개인주의가 공멸이라는 파국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해법을 찾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학자들이나 평화활동가들은 공히 평화를 위한 교육과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다.

1991~2002년 내전을 치른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목숨을 걸고 평화협정을 이끈 조르지오 비구찌(Giorgio Biguzzi) 주교(82·전 마케니교구장)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루려는 평화는 ‘주님의 평화’이지만 많은 이들이 평화의 실체를 잘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지식인들일수록 ‘주님의 평화’에서 멀어지기 쉽다. 하느님을, 평화를 잘 안다는 자만 때문이다. 이들은 ‘이성’이 ‘평화’를 담보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올바른 믿음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가치관이 동반되지 않는 ‘이성’이 얼마나 광폭해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근대 이후 경험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등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참된 믿음이 동반되지 않는 이성은 참된 ‘이성’이라고 할 수 없다. 프로크루스테스가 자기가 만든 침대 길이에 맞춰 사람을 재단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이성과 과학문명도 이성주의로 포장된 비인간적인 논리와 이데올로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이성’(ratio)이라는 말은 ‘비율’, 또는 ‘잰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한 잣대(ratio)는 주님 말씀뿐임을 알 때 그만큼 ‘주님의 평화’가 자라난다.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