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선택받기를 선택하기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4-03 수정일 2018-04-03 발행일 2018-04-08 제 308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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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의 응답으로 완성되는 ‘거룩한 부르심’
성소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하느님의 초대
참 행복·영원한 삶 향한 부르심 누구에게나 있어

찬미 예수님.

신학생들과 면담을 하다보면 자기 성소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 고민의 이유야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것은 ‘내가 과연 사제가 될 자격이 있을까?’라는 물음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깊어지지요. 저학년일 때는 큰 고민 없이 지내다가 고학년이 되어 수단을 입게 되면서, 또 교회의 직무로 주어지는 독서직과 시종직을 받으면서 이런 고민은 점점 커져갑니다. 그리고 교회의 성직자로 다시 태어나는 부제품을 앞두고 이 고민은 절정에 달합니다. 이러한 고민이 계속되다 보면 ‘내가 사제성소가 있는 게 맞나?’라는 불안한 마음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지요.

어떠세요? 그렇게 긴 시간을 신학교에서 생활해 왔으면서도 아직까지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게 여겨지시나요? 하지만 제가 느끼기엔 응당 해야 할 고민이고 또 평생을 되뇌어야 할 물음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신학교 생활을 성실하게 해왔고 또 많은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아, 이 정도면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 나 정도면 부제품, 사제품을 받기에 합당해’라고 자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하는 마음이라면 그것이 바로 교만의 모습이겠지요. 사제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격이 있고 잘 살아서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늘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금 주님 앞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훈화나 때론 수업 때에도 신학생들에게 성소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어보지요. 사제성소를 본인들이 택해서 신학교에 온 것이냐고요. 이러한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또 어떤 학생들은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성소라는 말 자체가 ‘거룩한 부르심’을 뜻하기에 이러한 부르심을 자기 자신이 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단 사제성소뿐만 아니라 수도성소 그리고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사목헌장」 19항)라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교 성소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소를 ‘택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성소, 부르심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인간의 지성으로 진리를 탐구하다가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런 하느님을 믿기로 결심한 데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모세에게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 만남에서부터 우리 신앙이 시작된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교를 ‘계시 종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셨기 때문에, 성소에 대해서도 그 성소를 택한 것이 아니라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신학생의 경우에도 사제성소를 택해서 신학교에 온 것이 아니라 사제직무로 부르심을 받아 신학교에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몇몇 학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그렇게 부르심에 응답해서 신학교에 온 것이 전부라면 자기 개인의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 때문입니다. 이 역시도 당연한 물음입니다.

자,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신앙인의 삶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따라 사는 삶이라면,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의지와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그저 하느님의 뜻대로, 온전히 수동적으로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만일 그런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이야기하는 자유의지는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절대적이거나 강압적인 방식으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부르심이나 초대가 아니라 명령이겠지요. 이와는 다르게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시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할지 안할지는 우리의 자유에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의 여정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초대에 응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초대에 응답할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부르심입니다.

다시 신학생의 경우로 돌아가 보면,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어떤 형태로든 사제성소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아무개야, 너는 신부로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우리가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할까’라는 물음에 가정을 이루는 삶이나 수도자의 삶 혹은 사제의 삶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하느님의 초대이고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성소의 경우라면, 사제직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맞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앞서 말씀드린 ‘능동적인 수동성’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부르심은 하느님의 몫이지만 응답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의 전체 여정에서는 수동적으로 따라가지만 그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모습에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중에 이런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선택받는 것을 선택하기!’ 근본적인 선택은 하느님께서 하시지만 그 안에 우리가 선택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표현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참 행복과 영원한 삶을 향한 초대이고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은 틀림이 없기에 의심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부르심에 나 자신이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살필 뿐입니다. 응답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