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능동적인 수동성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3-27 수정일 2018-03-27 발행일 2018-04-01 제 3088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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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이루는 구원
하느님 은총에 대한 믿음 동반된 영적 수련 바람직
‘수덕’ 통해 영성 깊어질수록 ‘신비’의 측면 더 드러나

찬미 예수님.

새 학기가 시작한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함께 지냈던 6학년 학생들이 지난 겨울에 부제품을 받고 다른 공동체로 옮겨갔고, 제가 있는 공동체에는 군복무를 마치고 3학년으로 복학한 새식구들이 들어왔지요. 방학 동안의 경험을 뒤로 하고 다시 신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학생들 모두 분주한 모습이고, 저도 또 학생들과의 면담을 시작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학기 초의 모습은 이렇듯 생명력이 넘칩니다. 새로운 시작을 맞아 다시금 무언가를 해보려는 마음, 의지와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부족했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들이죠. 그래서인지 늦은 밤에 기도방을 메우고 있는 학생들을 보는 마음이 참 흐뭇합니다.

정해진 형식을 따라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있는 우리의 삶 전체가 기도라고 말씀드렸지요. 하지만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밀도 있게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감각으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은총을 체험하기 위한 훈련이 따로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는 연습을 통해 우리 내면에 기도의 굳은살이 박일 때, 우리는 일상에서 더 쉽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어서가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더 쉽게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믿음의 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알게 된 첫 순간에 우리의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근거가 있을 때, 그 체험이 있을 때 믿음이 성장하게 되고 그런 후에라야 그러한 근거와 체험을 넘어서는 신비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믿음뿐만 아니라 다른 향주덕인 희망과 사랑에도 똑같이 해당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본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룰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믿음의 근거와 체험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신비 차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러한 부분을 영성신학에서는 ‘수덕’의 차원과 ‘신비’의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원래 수덕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연습이나 훈련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영성 생활과 관련하여 쓰이면서는 우리가 완덕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영적인 수련을 의미하게 되죠. 엄격한 방법을 따르는 기도 수련이나 극기, 희생, 절제와 같은 것이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수덕적 노력의 모습입니다. 이에 반해 신비라는 단어는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는 대상을 의미하는데, 우리 신앙의 배경에서는 비밀스럽고 감추어진 분으로서 모든 것을 넘어 계시는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구원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샤를 앙드레 베르나르, 「영성신학」, 45-46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를 살펴보면 수덕과 신비의 두 차원 중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먼저, 수덕 차원을 강조하는 모습은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회개를 위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해하는 관점입니다. 원죄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의 고행과 극기의 삶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영적 생활 안에서 우리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덕의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다보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에 대한 믿음을 소홀히 하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반면에 신비의 차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모습은 완덕을 향한 인간의 노력을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달린 것이기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이 맞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 주장 역시도 일방적으로 강조되다보면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17세기 프랑스 교회에서 있었던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라는 운동은 완덕에 이르기 위해서는 극기와 절제를 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맡겨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칩니다. 계명을 지킬 필요도, 극기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성사생활도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죠. 결국 이 운동은 인노첸시우스 11세 교황님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교 영적 여정에 있어서 이러한 수덕의 차원과 신비의 차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교회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모두를 함께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수덕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 여정이 완성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신비의 차원에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은 이미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에서도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보다 더 확실한 가르침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에게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성」이라는 작품에서 성녀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하나의 성에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 가장 바깥에 1궁방이 있고 가장 중심에 7궁방이 있는데 그 7궁방이 바로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라고 설명하시죠. 우리가 세례를 받게 되면 이 영혼의 성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이후에 각각의 궁방을 거쳐 마지막 궁방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과 영적 합일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계들 중에서 3궁방까지는 인간이 노력해서 갈 수 있지만, 그 이후 4궁방부터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셔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성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3궁방까지는 수덕의 차원이라면, 4궁방부터는 신비의 차원인 것입니다. 다르게 말씀드리면, 우리 영적 여정의 초기에는 수덕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그 여정이 깊어질수록 신비의 측면이 더 중요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수덕의 차원에서 우리 믿음의 근거를 찾는 노력들이 거듭될 때, 그 근거를 넘어서서 신덕 곧 신비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여정을 따라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여정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은총의 이끄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수동성을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우리 신앙의 ‘능동적인 수동성’입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