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주님 부활 대축일 특별기고] 파스카의 삶을 살자

노성기 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rn노성기(루보) 신부는 로마 교황청립 아우구스티니아눔
입력일 2018-03-27 수정일 2018-03-27 발행일 2018-04-01 제 3088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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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 가르침에 따르면 단식은 영성 생활을 위한 약
관능주의를 멀리하는 ‘눈의 단식’, 미워하는 말을 교정하는 ‘혀의 단식’ 등
교회, 영적 단식을 끊임없이 강조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실천할 때 진정한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수 있어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신자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떻게 해야 파스카의 삶을 살고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말 따로 행동 따로’, ‘신앙 따로, 삶 따로’, 즉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삽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삶과 존재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과 존재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이 되었고,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고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라고 결심하고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해답을 찾아봅시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시민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삶의 핵심은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었습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고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보고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고대 그리스도인들처럼 기도는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단식과 자선 실천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고대 교회에서 단식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순 시기에만 단식을 한 것이 아니라 부활 시기를 제외한 연중 시기에 일주일에 이틀 단식을 했습니다(수요일과 금요일). 하루 한 끼 단식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자주 단식을 했을까요?

첫 번째 주님의 수난에 온전히 동참하기 위해서 단식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단식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육체적인 절제와 단식의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하나의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했던 것처럼 단식도 열심히 했습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단식은 영성 생활을 위한 약이고 악습을 없애는 약이며 사탄에 맞선 싸움이고 고행이었습니다. 단식은 기도와 결합되어 주님께로 돌아서는 회개의 표시이고 온갖 유혹과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은총이며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식탁의 쾌락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깨어 있기 위해서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자주, 더 많이 자선을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단식일에 먹는 음식은 주로 빵과 물을 중심으로 한 소박하고 저렴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단식은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청빈은 가난한 사람들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하루 한 끼 단식해서 생긴 금액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에 대한 사랑(ㅣ)과 인간에 대한 사랑(ㅡ)이 만나는 십자가(ㅣ)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자들에 비해서 수도자들은 훨씬 더 엄격한 단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엄격한 단식중이라 할지라도 나그네가 찾아오면, 단식을 중단하고 따뜻하게 환대하였습니다. 환대는 모든 단식을 뛰어넘는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주님 모시듯이 정성을 다해 모셨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과부는 하느님의 제단입니다”(폴리카르푸스, 「필리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4,3). “자선은 천상의 행복에 참여하기 위한 쌈짓돈과 같습니다”(테르툴리아누스, 「호교론」, 39,5~6).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 자식 없는 사람이 고아를 양자로 삼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소녀를 받아들여도 됩니다”(「디다스칼리아」, 4,17).

암브로시우스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기도와 눈물과 단식은 … 모든 재산을 팔아서 만든 돈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재산입니다”(「참회론」, II,IX,81).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식하여 절약한 금액으로 배고픔을 느끼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시오”(『사순 시기 설교』, 10.12). “돌아갈 집과 머리를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는 그들은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감실을 자신들의 거처로 삼고 있습니다”(「설교」, 44,6).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는 “가난한 이를 위한 단식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속이는 자”라고 말합니다(「설교」, 7 참조).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단식은 기도를 들어 높이고 기도에 날개를 달아주어 하늘에 오르도록 해 줍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공동체의 가난한 신자들이 죽었을 때 공동체 재원으로 그들을 묻어주었다고 증언합니다(테르툴리아누스, 「호교론」, 39,9 참조). 에우세비우스도 비슷한 증언을 합니다. “대부분의 우리 형제들은 헌신적인 이웃 사랑으로 자신들의 몸을 사리지 않고 서로 도와주었습니다. … 그러나 이교인들에게는 이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앓기 시작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 아직 죽지 않은 이들을 길에 버리고, 죽은 이들을 매장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습니다”(「교회사」, 7,22,7.10).

교회는 영적 단식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영적 단식이란 영혼의 단식, 마음의 단식을 의미합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여러 가지 영적 단식이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를 유혹하는 온갖 관능주의를 멀리하는 눈의 단식, 수많은 소음을 거슬러서 침묵 공간을 특별히 마련하는 귀의 단식,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말을 교정하는 혀의 단식, 나쁜 생각을 멀리하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하는 생각의 단식 등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단식하면서 영혼에 해로운 악습을 끊어버리는 영적 단식을 하지 않는다면, 육체적인 고통인 단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라벤나의 대주교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단식으로 목과 싸우고, 정결로 사치와 싸우며, 믿음으로 악행과 싸웁니다”(「설교」, 13,1). “단식은 죄의 상처를 낫게 해주며, 자비는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없애 줍니다”(41,3). “기도와 단식과 자비는 믿음을 뿌리내리게 해주는 세 가지 조건입니다. 단식은 기도의 영혼입니다. 단식의 생명은 자비입니다. 따라서 자비가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43,2,4).

고대에는 각 지역 교회마다 자선 실천 단체들이 많았습니다. 3세기 중엽, 로마의 주교 코르넬리우스는 로마 교회 공동체가 과부를 1500명 이상 돌봐주었다고 증언합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과부와 동정녀를 3000명 이상 돌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감옥에 갇힌 이들, 여행자 숙소의 환자, 나병환자, 성전 계단에서 구걸하는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자선가 요한은 교회가 7500명 이상을 돌보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레고리우스 대 교황 당시(590〜604) 로마 교회의 명부에는 무료 급식자들의 명단이 책 한 권을 가득 채웠습니다.

각 지역 교회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따뜻하게 맞이하기 위한 숙박 시설과 병자를 치료해주는 시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했던 이 같은 환대를 영어로 ‘Hospitality’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환대(Hospitality)가 인류 역사에 두 가지 엄청난 유산을 물려줍니다. 하나는 호텔(Hotel)이고, 다른 하나는 병원(Hospital)입니다. 로마제국 말기까지도 로마제국 안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시민들을 위한 병원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사랑과 자선 실천의 결정체가 바로 병원이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사회복지 복합건물(병원)은 카이사리아의 대 바실리우스가 세운 ‘바실리아드’입니다(372). ‘카리타스의 도시’(사랑의 도시)라고 불린 바실리아드는 여행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숙소이자 병자들을 위한 병원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고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우리도 고대 그리스도인들처럼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참으로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고 파스카의 삶을 사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다함께 서로서로를 격려하며 그 길을 걸어갑시다.

노성기 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rn노성기(루보) 신부는 로마 교황청립 아우구스티니아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