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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2) 필립 맥도나휴 전 아일랜드 대사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8-03-27 수정일 2018-03-28 발행일 2018-04-01 제 308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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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통한 대화의 문 열릴 때 평화의 길 시작돼”
정치·종교적 갈등 복잡하게 얽혀 해결 어려웠던 북아일랜드 분쟁
같은 토대 아래 보편적 진리 찾는 종교가 평화협정 체결에 큰 역할
한반도 역시 그리스도인 역할 중요 
평화는 이해·협력 향해 가는 ‘여정’ 서로 상처 치유하려는 태도 지녀야

필립 맥도나휴씨는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종교가 큰 역할을 했다”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과정에도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에는 한국과 많이 닮은 나라가 있다. 아일랜드가 그렇다. 그 유사성으로 많은 유럽인들이 한국을 ‘동양의 아일랜드’라고 부른다. 무엇이 그토록 닮아서 그런 이름까지 붙었을까.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오랫동안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점에서 아일랜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정도로 강성했던 영국과 인접해 있어서 12세기 이래 800년 가까이 식민 지배를 받아야 했다. 특히 16세기 중반 영국이 성공회로 국교를 바꾼 반면, 아일랜드는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면서 갈등이 증폭되기만 했다.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는 한편 아일랜드에 영국 개신교 이주민을 보내는 식민화 정책을 펼치면서 두 나라 간 갈등은 극에 달했다.

영국과 아일랜드 간 갈등의 역사는 1921년 12월 6일 북아일랜드 6개주를 제외한 남아일랜드 26개주의 자치를 승인한 ‘영국-아일랜드 협정’(Anglo-Irish Treaty)으로 ‘아일랜드 자치국’이 들어서면서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하지만 평화협정은 모든 갈등을 ‘평화’로 봉합하지 못했다. 북아일랜드 때문이다. 1968년 ‘2등 시민’으로 대우받던 북아일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의 시민권 운동으로 촉발된 ‘북아일랜드 분쟁’은 영국과 아일랜드 두 나라뿐 아니라 인간 이성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후 30년간 이어진 양측의 유혈 충돌로 발생한 사망자만 무려 3700여 명. 부상자를 포함한 사상자 수는 5만 명을 훌쩍 넘는다.

인류 이성이 새롭게 눈을 뜬 20세기 선진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믿는 방식은 다르지만 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자신들이 믿는 주님을 멋대로 재단한, 그래서 결국 주님의 자리에 악마를 불러들인 인간의 오만함을 돌아보게 한다.

1998년 4월 10일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 근교 스토몬트(Stormont). 영국 토니 블레어(Tony Blair) 총리와 아일랜드 버티 아헌(Bertie Ahern) 총리 등 가톨릭·개신교 대표들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1996년 6월 시작돼 2년 가까이 이어온 마라톤 협상 끝에 북아일랜드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벨파스트 협정(Belfast Agreement)’이 체결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협정이 체결된 날이 주님 부활 대축일 이틀 전인 성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성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라고도 불린다.

“성금요일 협정은 1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역사적 돌파구였습니다.”

‘성금요일 협정’ 체결을 전후한 1994~1999년 영국 주재 아일랜드대사관에서 일하며 ‘평화 특사’로 협정 과정에 참가했던 필립 맥도나휴(Philip McDonach)씨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모양이었다.

3월 7일 서울에서 열린 ‘글로벌 비즈니스 평화상’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 한국을 찾은 맥도나휴씨는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가 주는 교훈이 한국을 비롯한 다른 분쟁지역에서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협정이 추진되던 당시 그는 영국, 북아일랜드 지도자들과 아일랜드 정부 관계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에 가장 힘을 기울였다.

“평화를 위한 첫걸음은 만남입니다. 만남을 통해 대화의 문이 열릴 때 평화의 길이 시작됩니다.”

가톨릭을 비롯해 성공회, 장로회 등 다양한 그리스도교 종파가 모이는 대화 모임에 참여한 것도 그때의 경험이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테러리스트’로 불리던 개신교 정치범들을 감옥으로 찾아가 만나는 일도 평화의 길을 내기 위한 한 과정이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영국과 아일랜드 간 반목의 역사는 물론, 가톨릭·개신교 사이의 종교 갈등, 북아일랜드 내 민족주의와 연합주의의 대립 등이 얽힌 복합한 문제였다. 갈등 양상이 복잡했던 만큼 갈등을 풀어나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맥도나휴씨는 영국령으로 잔류를 원하는 얼스터연합당(UUP) 당수 데이비드 트림블(William David Trimble)과 사회민주노동당 당수 존 흄 (John Hume)을 한 테이블에 앉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북아일랜드 분쟁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는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종교가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북아일랜드 인구 다수가 믿고 있는 장로회, 영국 국교인 성공회, 아일랜드 다수 종교인 가톨릭교회는 평화를 위한 대화에 앞장섰다.

“종교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 종교들은 신학적으로 같은 토대 위에 있었습니다.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도 종교적 철학을 바탕으로 보편적 진리를 찾고 그 진리 위에 구체적 계획들을 세워가는 과정을 존중했습니다.”

맥도나휴씨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과정에도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반도 상황을 보면 남한과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들이 얽혀 있습니다. 하지만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공유하는 가치와 진리가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 보편적 이상을 도출해가는 과정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평화를 대하는 태도로 흥미로운 예를 들었다.

“한국에 와서 행사에 참여하면서 축하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여운 제비를 대하는 두 형제의 이야기였어요. 동생은 불쌍한 제비의 다리를 고쳐줘 복을 받지만 형은 재물을 탐해 일부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렸고 벌을 받게 됩니다.”

‘흥부전’ 얘기다. 그는 평화를 대하는 태도도 제비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고 말했다. “평화를 바란다면 서로의 상처를 소중히 다루고 치유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평화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면 모든 걸 잃게 됩니다.”

그는 단순히 전쟁을 하지 않는 상황적 평화가 아닌 ‘긍정적인 평화(Positive Peace)’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누구도 억압받거나 배제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또한 평화는 한 걸음 한 걸음 이해와 협력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journey)이라고 정의한다.

한반도에 모처럼 훈풍이 분다. 하지만 그간 경험을 통해 평화를 향한 여정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이 여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흥부가 될 것인지, 평화를 내어 놓으라고 윽박지르며 폭력을 행하는 놀부가 될 것인가….

◈ 필립 맥도나휴씨는

분쟁의 땅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조부모 대부터 영국과의 오랜 분쟁을 체험하며 자랐다. 아일랜드인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한 것은 평화의 사도로서 소중한 경험이 됐다.

1994~1999년 영국 주재 아일랜드대사관에서 일하며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 참여했다.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인도, 교황청, 핀란드, 러시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서 아일랜드 대사로 활동했다. 시와 희곡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평화의 제도화와 관련해 협정이라는 법률적 형태도 중요하지만, 군사적 신뢰구축부터 군축까지 실질적인 평화정착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법적인 평화’가 아니라, ‘사실상의 평화’를 더 고민하고, ‘결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평화’를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 북아일랜드는

오랜 세기 분쟁의 땅이었다. 1922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아일랜드 자치국이 수립됐지만 영국은 개신교 신자 집중 거주지역인 북아일랜드 6개 주를 독립에서 제외시켜 ‘북아일랜드 분쟁’의 여지를 남겼다. 소수였던 북아일랜드 가톨릭계 주민들은 심한 차별을 받아야 했고 이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원인이 됐다.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