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103위 성인약전] 성 이윤일 요한 / 김옥희 수녀 <끝>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 기념관장
입력일 2018-03-23 수정일 2018-03-23 발행일 1985-08-18 제 146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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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서 순교한 대구의 성인
사형선고 받고“나를 꼭 따라오너라”자녀들에 당부
103위 성인의 가장 마지막 서열의 명단에 나오는 성 이윤일 (일명:제현) 요한은 1812년 본래 신자집안에서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후 문경새재 여우목에 이사하여 안주한 그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이 요한은 키가 큰데다 길고도 숱이 많은 수염까지 기르고있어 위풍이 당당했었고 또한 신심이 깊고 열열한데다 성질이 온순하고 솔직담백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의 가정은 대대로 내려오는 신자 가문으로서 선친들중에 여러분들이 전교회장을 지냈었다. 이 요한도 가풍을 이어받아 온갖 가능한 방법과 노력으로 자기본분은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때는 1866년 시월 상달(11월7일부터 12월 6일사이)-성 이요한의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이요한은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 그냥 앉아 있었다. 물론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기를 더 원하였던 것이다. 포졸들이 이요한에게 와서『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기 누구냐』고 묻자 그는 선뜻 나서서『바로 나요』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계속해서『이 마을 밖에도 천주교를 믿고 행하는 자가 있느냐』는 포졸들의 물음에는 부정하였다. 이때 그와 함께 체포된 교우들의 수는 거의 30여명이나 되었는데 이들 중 이요한의 집안사람은 8명이나 들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다 문경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때마침 현감이 공석중이라서 심문은 없었으나 그 반면 포졸들이 설쳐 돈을 뺏을 목적으로 이요한을 고문한 후 종래는 그의 집에까지 가서 재산을 모두 약탈해갔다. 여하간 포졸들은 이곳에서 3일을 끌다가 다시 상주 고을로 교우들을 이송하였다.

이 요한에게는 목에 큰 칼을 씌우고 발은 쇠사슬로 묶었다. 상주에 도착하자 이 요한은 초하루와 보름과 그믐 날 이렇게 한 달에 세번씩이나 끌려나가 3개월 동안 문초와 형벌을 받았는데、이때마다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더욱 다짐하며 또한 자기와 함께 잡혀 끌려 온 교우들 외에 다른 동료는 없다고 똑똑하게 잘라 말했다. 상주 목사가 배교한다고 한번만 말해보라고 유혹해 봤지만 이 요한은 한사코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계속된 여러가지 잔인한 고문과 형벌을 크나 큰 용덕으로써 참아 견디어 나갔다.

한편 상주목사는 마지막 문초를 마친 다음 70여명의 교우들을 세편으로 갈라세웠다. 첫째편은 집으로 돌려보낼 배교한자들과 어린애들이었고、둘째편에는 신앙을 고집하기 때문에 처형될 21명이었으며 세째편은 요한과 같은 소위 사교의 두목들이었다. 상주목사는 또한 죄수들에 대한 보고를 서울에 보낸후 하교를 기다리던 중 1867년 1월 4일 대원군이 임금의 윤허를 얻어 군중에게 교훈이 되도록 사형하라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려 받았다.

그리하여 이요한에게 사학 괴수의 으뜸이라하여 마침내 사형선고문이 낭독되고 세번씩이나 곤장을 때린후에 회장 김씨 형제 세사람만 그 지방의 중심인 대구 남문밖 관덕정에 압송하였다. 이요한은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출발하기 전에 자녀들한테 말하기를『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후에는 꼭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감옥에있는 동안에도 다른 동료 교우들에게 훌륭한 표양을 보여 주었었다. 그는 자주 기도에 열중하면서 옆에 있는 교우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큰 칼을 목에 쓰고 있으면서도 늘 평온하고 침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867년 1월 21일 이요한은 마침내 대구 남문 밖으로 끌려 나아가 포졸들이 주는 마지막 음식을 다 받아먹었다.

그 후 이요한은 형리를 불러자기 주머니에 있던 돈을 전부 꺼내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여보게、이것을 돈이라고 하네. 나는 이런 것을 주머니에 넣은 채 죽고 싶지가 않으니 이것은 자네나 갖게. 그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 주게나. 』이렇게 만만한 여유을 보이면서 이요한은 쓰고 있는 칼의 밑 받침대를 손수댄 다음 조용히 형리의 행동을 기다리다가 45세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그의 시체는 그날밤 형장 근처에 묻었다가 3년후에 날뫼(현、대구 비산동) 뒷산에 교우들의 손으로 정성되이 안장되었다.

86회에 걸쳐 연재돼온「103위 성인약전」은 이번호로 끝납니다. 지금까지 집필해주신 김옥희수녀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애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 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