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로 본다] (5.끝) 신과 인간 (2010)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8-03-20 수정일 2018-03-20 발행일 2018-03-25 제 3087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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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삶과 죽음의 갈림길서 깊은 고뇌

1996년 5월 31일, 알제리 북부 메데아시의 한 도로변에서 엄률시토회(The 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 O.C.S.O. ‘트라피스트회’로 불림) 일곱 수도자들의 주검이 발견됐다. 티비린 인근 아틀라스 트라피스트 봉쇄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앞서 3월 27일 20여 명의 무장 괴한에 의해 납치됐었다. 알제리 무장이슬람그룹(GIA)은 공식 성명을 통해 자신들이 5월 21일 이들 수도자들을 처형했다고 발표했다. 영화 ‘신과 인간’(Des Hommes Et Des Dieux(프랑스어 원제), Of Gods And Men, 2010)은 실제로 있었던 트라피스트회 수사들의 순교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 이슬람교도들과 가톨릭 수사들의 평온한 일상

시편의 한 구절을 읊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수도원의 종소리가 울리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처럼 죽으리라. 여느 대관들처럼 쓰러지리라.”(시편 82,6-7)

아틀라스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알제리 티비린 인근 산골마을이었다.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마을 주민들은 모두 이슬람교도들이다. 수도원은 마치 섬처럼 이슬람 세상 한 가운데 떠 있었지만, 프랑스 출신의 수사들과 이슬람교도들인 마을 사람들은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수사들은 이른 새벽 작은 서재에 모여 드리는 찬미로 하루를 시작한다. 수도원의 종소리는 이슬람 사원의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와 조화를 이뤄 마을을 감싸준다. 의사이기도 한 뤽 수사는 자신이 치료한 어린 환자에게 입을 맞추고, 낡은 신발을 신고 온 여인에게는 신발을 갈아 신긴다. 원장인 크리스티앙 수사의 책상에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과 성 프란치스코의 책이 함께 놓여 있다. 그렇게 이슬람교도 주민들과 가톨릭의 수사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형제로 살아가고 있었다.

■ 고뇌에 찬 식별의 여정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롭던 마을에도 이슬람 근본주의 반군들이 나타난다. 얼마 뒤 성탄 전야에 이슬람 반군들은 수도원에 침입한다. 크리스티앙 수사는 거칠게 구는 반군들에게 ‘코란’의 구절들을 들려주면서 부드럽게 설득한다. 반군들은 돌아선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수사들은 살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야할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수도원에 남아야할지 선택을 강요받는 고뇌의 시간을 맞는다.

수사들은 평온하던 일상을 깬 폭력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 조금씩 다른 태도와 표정을 보인다.

“하느님은 왜 이런 엄청난 고통을 허락하실까?”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각자 식별을 통해 선택을 해나간다.

이미 연로한 뤽 수사는 두려움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대부분의 수사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나약함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삼키고 성화 속 예수님에게 기대서서 위로와 위안을 찾으려 애쓴다.

마침내 수사들은 긴 고뇌의 과정을 거쳐 모두 함께 수도원에 남기로 결정한다.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피땀 흘린 기도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수난의 길을 걸어갔듯이, 수사들은 이제 마지막 선택을 한 뒤 평화를 회복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 최후의 만찬, 그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영화의 절정은 ‘최후의 만찬’을 연상케 하는 저녁 식사 장면이다. 각자 고뇌 끝에 내린 최후의 결정 후 수사들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 ‘백조의 호수’가 잔잔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포도주 두 병을 열고, 평소와 같은 소박한 만찬의 자리를 갖는다. 평온한 표정, 미소와 눈물이 함께한 만찬 장면은 서로간의 깊은 일치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화를 보여준다.

바로 그 날, 만찬을 마치고 침대에 든 바로 그 날, 한밤중에 무장 괴한들이 수도원에 난입해 7명의 수사들을 납치했다. 괴한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2명의 수사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그 날의 이야기를 전했다. 납치된 수사들은 그로부터 두 달 뒤 메데아시 길가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영화는 그들이 반군들에 이끌려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이미 죽음을 예감했고, 식별을 통해 순교를 결심한 그들은 마지막 여정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묵묵히 서로의 어깨를 부축한 채 눈보라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그 위로 크리스티앙 수사의 마지막 유언이 전해진다.

“나의 생명은 하느님과 이 땅에 바쳐졌다는 것을 나의 공동체, 나의 교회, 나의 가족은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다가온 죽음, 이해할 수 없는 위협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뇌하고, 그 수난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인 수사들의 삶은 인류 고통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수난기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일곱 수사들은 현재 시복을 앞두고 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