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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십자가를 그으리라’ / 노중호 신부

노중호 신부 (성남대리구 서부본당 주임)
입력일 2018-03-20 수정일 2018-03-20 발행일 2018-03-25 제 308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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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경은 기도인가요? 아닌가요? 교우들에게 여쭈어보면 의아해 하십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훌륭한 기도입니다. 모든 시작과 마침의 기도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신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는 기도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녀임을 늘 잊지 않고 기억하는 기도입니다.

고해성사 안에서, 면담 안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자주 발생합니다. 미치도록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기 싫은데 봐야 해서 더 괴롭습니다. 저쪽에서 그 사람이 보이면 다른 길로 피해가고 싶은데 같은 성당에 다니고, 같은 회사에 다녀서, 또 다른 측면으로는 가장 가까이 같은 집에 있어서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습니다. 욕이 나오지요.

그럴 땐 성호경을 긋고 욕하십시오. 그냥 욕하면 죄가 쌓여서 고해실에 또 오셔야 하는데 욕하기 전에 성호경 그어보십시오. 미운 마음이 차고 넘치기 전에 성호경 하십시오. 그러면 희생과 극기의 기도가 됩니다. 십자가 예수님 때문에 욕이 아니라 기도로 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저는 다시 성호경을 하며 십자가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리, 이보다 더 이상 잔인할 수 없는 가시관에 짓눌리셨습니다. 양 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손이었는데, 이제 크나큰 못에 박혀 내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슴, 병사의 창에 찔려 온몸에 피와 물이 쏟아져 숨도 쉴 수 없습니다. 양 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말씀이 이미 끝난 듯 고통 속에 버티어 서 있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통보다 예수님께서 더 고통스러우셨던 것은 ‘침묵’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내 모든 걸 바쳐 기도했는데 들어주지 않으셨다는 마음이 가득차고, 도대체 믿지 못하겠거든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이 그러셨다는 것을 기억하시며 성호경을 계속해서 하십시오. 사실 그 시간 아버지 하느님도, 성령 하느님도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고통에 함께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프로선수가 되십시오.”

제가 살던 시기에 계시지 않으셨지만, 신앙의 못자리 수원 신학교의 배문환(도미니코) 학장 신부님께서 늘 하셨던 말씀이라고 선배들에게 들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강원도 삼척에서 물에 빠진 교우를 구하시고 하늘나라에 오르신 신부님께서 신학생들에게 늘 전하시고 가슴에 새겨주신 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성호경을 그을 때,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하늘과 땅, 즉 하느님과 나의 만남입니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까지는 이어지는 순간에는 나와 이웃,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임의 마음이십니다. 성호경의 삶을 살아야 부활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십자가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따라 사는 신앙인들이기에 예수님 없는 십자가,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한 순간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봉헌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살았던 십자가의 사랑뿐일 것입니다.

노중호 신부 (성남대리구 서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