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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 약전] 86. 성 한재권 요셉, 성 정원지 베드로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입력일 2018-03-16 수정일 2018-03-16 발행일 1985-07-28 제 146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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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한재권 요셉 장작 패다 붙잡혀…부친의 배교 간청 뿌리쳐
“천국에서 다시 만날것이오” 가족들 위로 성 정원지 베드로
(※성 한 요셉의 성명 및 본명 내용 등에 성인의 시복조사서에서 오기가 있었으므로 본고에서는 김진소 신부의 새 조사 보고서에 따르기로 한다.)

성 한 요셉(재권)은 자가 원익(元益)이었고 (동생 元端과 바뀌었다고함) 1834년에 독실한 신자였던 부친 한언적(韓彦蹟ㆍ도미니꼬)과 모친 성주 배씨(星州 裵氏)사이에 장자(長子)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 막달레나와 혼인했으나 끝내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의 부친은 충청도 진잠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전라도 고산 다리실(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 공소)로 피신 했으며 그 후 그 가족들은 다시 대성동 신리골(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병인교난을 맞이했다.

한요셉은 충청도 진잠에서 회장을 지냈으나 대성동에 이사온 후에는 손베드로(선지)가 이미 회장직에 있었으므로 그 직책을 그만두었지만 훌륭한 표양과 모범적인 신앙 생활로 교우와 외인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866년 12월 3일 저녁 포졸들이 그의 마을을 급습하였을 때 그는 전혀 모르고 집에서 장작을 패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전주 감옥에 수감되자 그의 부친은 친구 박별감을 통해 그의 석방을 교섭하는 한편 간절한 편지로써 옥중에 있는 한 요셉에게 배교 하기를 간곡히 타일렀다. 그러나 그는『배교 하란 말은 부당합니다. 아버님이 아무리 애쓰셔도 소용없는 헛고생 이십니다. 저는 하느님을 위해 생명도 바칠 각오가 돼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거절했으나 그의 부친은 감옥에까지 찾아들어와 배교를 간청하였다.

이에 그는『아버님! 아버님은 저말고도 여러 형제가 있으니 저를 없는 아들로 여겨 주시고 돌아가 주십시오』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물론 그의 심정은 말할 수 없는 번민과 부친이나 가족에게 대한 근심으로 가득채워졌으나 한 요셉은 이러한 영육의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순교할 수 있는 용덕과 신앙심을 간직하도록 항상 기구하면서 이 고통을 극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도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아들을 위해 포도청 관리에게 뇌물을 계속 보내주었다. 그랬으므로 관리들은 한 요셉을 여러모로 놓아주려고 갖은 고문을 하지 않으며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했으나 끝내 배교하기를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에 처하기 위해 장계하고 말았다. 물론 그는 수차례의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1866년 12월 13일 자신의 가장 큰 소망대로 전주 숲정이 사형장에 나아가 참수형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31세였고 그의 시체는 처음에 용마루 재에 묻혔다가 그 다음해 3월초에 그의 가족들에 의해 전주 지방 고산 다리실에 묻혔다고 한다.

성 정원지 베드로는 1845년 충청도 진잠에서 열심한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중교우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일찍 순교하였고 그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는 신자들이 살고있는 마을을 따라서 옮겨 살았는데 처음에는 전주지방 양량 수널마루에서 살다가 금구지방으로 이사했었고 체포되기 얼마전에는 전주지방 성지동 교우촌으로 이사하여 결혼、아내와 함께 형과 한집에서 조 베드로의 집에 셋방을 들어서 살았다. 그는 대단히 착실하고 열심한 젊은 신자였기 때문에 조베드로는 이 젊은이를 성의껏 지도해 주었다. 조베드로가 체포되던 1866년 12월 5일 저녁에 포졸들이 그의 마을에 들이닥치자 정베드로는 산으로 피신하여 마을의 동정을 살피다가 동네 뒤 발몬리라는 산마루에서 포졸과 마주쳐서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조베드로 등 일행과 함께 구진퍼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전주감영에 수감되었다.

심문이 시작되자 모든사람이 순교의 영광을 기뻐하였지만 효성이 지극한 그는 늙은 모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처음에는 천주교 신자임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다른 여러 교우와 특히 조 베드로의 격려로 마음을 바로잡고 다시 번복하여 교우임을 똑똑히 밝히면서 그의 신앙의 기쁨을 되찾고 또 가족들에게는『천국에서 우리는 서로 만날 때가 있을것이니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가족들을 오히려 위안했던 것이다.

누가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는가를 고발하라고해서 고문을 당할때도 그는 유일한 스승은 천주교를 믿다가 이미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한분 뿐이라고 확실히 밝혔다. 자기 아버지가 이 교를 신봉하다가 죽었는데도 같은 교를 또 믿는다고 해서 놀라는 포졸들에게 정베드로는『그렇소 나는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를 만나 뵙기 위해서도 성교진리를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말을 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은『네가 만일 배교한다는 한마디만 하면 우리는 너를 살려 내보내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정 베드로는『그럴 수 없소 나도 아버지 뒤를 따라 죽기를 원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포졸들은 미친 놈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머리와 손을 한데 묶어 포도청 안으로 끌고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정베드로는성지동에서 잡혀 온 다른 교우들을 감옥에서만나게되었다.

감옥에 갇힌지 9일이 지난 12월 13일(1866년) 정 베드로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형 집행을 위해 모든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동안 포도청의 관리 하나가 술에 취하여 죄수들을 희롱하며 약을 올려 주려고『죽어 천당은 무슨 놈의 천당이냐?』고 하며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때 정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번쩍 들고『몰상식한 놈 같으니、그래 너는 네 아버지 네 어머니를 저주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머리를 숙여 움직이지도 않고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동료 교우들은 계속해서 기도를 하였는데 이들의 얼굴에는 근심하는 기색이 있기는 커녕 평온하기만 하였다. 처형 준비가 다 끝나자 관장은 사형수들의 죄목을 일일이 다 낭독하는 등 모든 절차를 진행시켰다. 이윽고 정베드로는 자기 차례가 되자 조금도 주저치 않고 자기 머리를 형리에게 내밀어 주니 첫칼에 스물 한살된 정 베드로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며칠후 오 사현의 주선으로 순교지 근처 용마루 재에 임시로 묻혔다가 그 이듬해 3월초에 그의 형 정원집에 의해 고산 지방 다리실로 이장 되었다.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