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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로 본다] (4) 거룩한 소녀 마리아(2014)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8-03-13 수정일 2018-03-13 발행일 2018-03-18 제 3086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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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마지막 선택… 결국은 신앙이었다

“내게 종교는 애증의 대상이다. 한편으로는 현재 세상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일이 다 종교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초월적 존재가 세상을 감싸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영성을 존중한다.”

영화 ‘거룩한 소녀 마리아’(Kreuzweg(독어 원제), Stations of the Cross, 2014)의 감독 디트리히 브뤼게만(Dietrich Bruggemann)이 영화 개봉 직후 주간지 ‘매거진 M’ 인터뷰를 통해 한 말이다. 비신자든 신자든 혹은 다른 종교의 신봉자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역사는 종교와 믿음을 빙자해서 저질러진 수많은 악행을 증명하고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비교적 신인에 속하는 40대 초반의 디트리히 브뤼게만 감독은 이 영화에서 두 가지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애증’에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두 가지 문제의식이란 첫째 억압적이고 맹목적인 종교의 폐해, 둘째 순수한 믿음에서 나오는 희생의 참된 의미다. 감독은 종교의 억압성이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자에 대한 순수한 신뢰와 자기 헌신의 의미는 여전히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 사춘기 소녀의 14처

사순 시기에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친다. 이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고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전 과정을 14처로 나눠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 형식을 따라, 모두 14개 장면으로 구성했다. 특히 각 장은 길게는 15분까지 하나의 장면으로 이어지는 롱테이크 기법으로 촬영했다.

예를 들어 영화는 마리아와 또래 아이들이 성당에서 성경 공부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4처 중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하는 첫 장면에서, 신부는 견진성사를 앞둔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전사’로 거듭 날 것을 당부하며 ‘희생’을 권유한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하는 두 번째 장면은,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언덕을 힘없이 오르는 마리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 간 마리아가 옷을 벗고 의사 앞에 앉은 모습을 보여주는 제10장은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하는 제10처를 연상시킨다.

■ 억압적 종교의 폐해

주인공 마리아(레아 반 아켄)는 14세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영화는 마리아가 오직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때로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예수의 수난에 대응되는 고통과 희생의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소녀 이야기, 또는 십자가의 길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점만으로 신자들이 단체 관람에 나설 만한 경건한 신심영화에 속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평범한 일상과는 괴리되고 모든 인간적 기쁨까지도 죄악시하는 억압적 종교심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마리아는 항상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한다. 예를 들어 추위를 감내하는 ‘희생’으로 조물주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겉옷을 벗어버린다. 찡그린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서는 행동으로써 예쁘게 보이려는 마음에 대해 경계한다.

이러한 마리아의 태도에는 주위 어른들의 억압적 강요가 작용했다. 사춘기 소녀의 감성은 주임 신부나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신부는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간음’으로 몰아세우고, 엄마는 흥겨운 가스펠송을 죄악시한다.

■ 자기희생의 숭고한 가치

평범한 소녀의 일상과 신앙생활은 고통스럽고 억압된 삶으로 변했다. 남자친구와 함께 그가 다니는 성가대에서 가스펠송을 불렀다는 사실을 신부와 엄마에게 고백한 마리아는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타락한 창녀처럼 취급받는다. 마리아는 이제 친구들과 세상에서 격리된 채 왜곡되고 근본주의적인 맹목적 신앙인으로 보여진다.

그 극단적인 신앙의 마지막 형태는 자기희생이었다. 마리아는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말을 하지 못하는 동생의 입을 열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음식을 거부했다. 쇠약해진 몸으로 병원에 입원해서도 치료를 거부함으로써 마리아는 결국 목숨을 잃지만, 놀랍게도 마지막 순간에 동생이 입을 뗀다.

기적의 범주에 속할 만한 이 최후의 반전은 이전까지 계속됐던, 억압적 신앙 태도에 대한 힐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수한 믿음과 타인을 위한 희생은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는 감독의 신념을 결정적으로 전해준다. 그는 마리아의 선택, 즉 주위의 어른들로부터 강요된 맹목적인 신앙 행태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으며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일은 가장 고귀한 실천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영화 ‘거룩한 소녀 마리아’는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2014) 은곰상과 각본상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