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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약전] 성 손선지 베드로 / 김옥희 수녀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 순교자 기념관장
입력일 2018-03-02 수정일 2018-03-02 발행일 1985-07-14 제 146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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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ㆍ아들의 구명운동도 거부
형장으로 가면서 자신의 옷을 동료에게 
성 손 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임천지방의 괴인돌에서 1819년 영세를 준비하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에게서 직접 교리를 배우고 영세하여 어릴때부터 신앙심이 돈독하였던 것이다.

정샤스땅 신부는 그의 신심과 열심하고 모범적인 태도를 보고 그를 일찍 전교회장직에 임명하였으며 전주 대성동 신리골로 이사하고서는 자기집을 그 마을 교우들을 위해 공소로 내놓았던 것이다.

그는 어느 누구 보다도 전교회장 본분을 잘지켜 나갔을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기쁜 얼굴로 대해、남에게 마음 상하게 하는 언행을 하는 것을 본사람이 없을 정도로 애덕실천에 철저하여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생활을 충실하게 살았던 것이다. 한편 그는 가정의 가장으로서도 자녀 교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특히 종교와 신심 교육에 있어서는 더욱 열심히 가르쳐서 대단히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했던것이다.

그가 47세가 되던해 마침 1866년(병인년) 대교난이 일어나자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소문이 펴졌던 것이다. 마침 그해 겨울 무렵 주일공소 예절에 많은 남녀교우가 모여 공소 예절을 열심히 할때 손베드로는 모든 신자들앞에서『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과 같이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거두시려는 모양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순교할 뜻을 은근히 밝혔다. 그리고 또 무사하기를 원하는 교우들에게는 속히 피신하라고 당부했다.

그후 12월 3일에 그날도 주일날 공소 예절의 기도가 끝나서 누가 그를 부르는소리가 나자 즉시 포졸들이 온것을 알고 신자들과 그의 가족을 뒷문으로 피신시키고 그는 순순히 교우라는것을 자백하고 체포되었다.

손 베드로가 체포된 뒤 정문호 정원지와 함께 그곳 삼거리 구진퍼리에서、성지동에서 체포되어온 조화서 부자와 이명서 한원서 등과 함께 만났다. 이때 손 베드로의 모친은 전부터 잘아는 지방관리를 찾아가 아들 구명운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포교는『석방되고 안되는 것은 손선지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배교만 한다면 당장에 방면할것이오』라고 했다. 외교인 오사문도 손 베드로 모친의 청을 듣고 수차례 옥중에 찾아가서 그를 설득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결코 배교할 뜻이 없으며 순교할 각오가 단단히 되어있노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손베드로와 그외 체포된 동료들은 전주감사 앞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가 전주 옥에 갇혀 있을때도 19세가 되는 효성이 지극한 그의 아들이 감영에 찾아와서 또 다시 부친의 구면 운동을 하기 위해 돈을 마련하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녔다. 손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아들의 효심을 가상히 여겼지만 아들을 크게 꾸짖으며 그일을 중단시켰다.

『나에겐 큰 유혹이 되니 앞으로는 무슨일이 있더라도 감영에 들어오지 말라』고 엄중하게 일렀다.

그는 또한 전교회장이란 직분이 알려져서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며 절대로 배교하지않을 것이니 국법대로 속히 처단해 달라고 호소 하였지만 문초는 끈질겼던 것이다. 문초관들은『너는 천주교의 괴수이며 서양 사람들이 너의 집에 출입 하였다하니 그들의 행방을 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기를『서양 사람은 상경한 후 소식이 없으니 알 길이 없고 가르친 사람이나 고발할 사람도 없으며 교리책이나 성물도 물론 없다』라고 답변했으므로 형리들은 혹독한 고문과 주리형을 잔인하게 가하다가 그의 팔을 완전히 부러뜨리고 말았다.

한편 그는 광장앞에서 보다도 포졸이나 형리들의 사사로운 형벌을 더많이 받았다. 용감한 손 베드로는 끝내 계속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았고 모든 고통을 잘참아 견디었다. 그가 숲정이 처형장으로 향하기 위해 감옥을 나설때도 그곳에 더남아 기다려야하는 다른 교우 하나에게 자기옷을 주면서『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옷을 입으시오』라고 태연하게 말하였다. 지정된 사형장에 도착해서도 손 베드로는 희광이한테 목을 내주기전에 먼저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기도를 드렸다. 최 요셉이란 사람은 손 베드로가 여러번 계속해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후에 증언하였다.

이윽고 칼을 든 병졸이 손베드로의 어깨를 내리치자 그는 죽은체 하기는커녕 오히려 머리를 쳐들며『장난하지 마시오』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희광이는 다시 칼을 높이 올렸다가 힘있게 내리치니 47세의 장부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후에 교우들이 와 그의 시체를 정성껏 거두어 장례를 지냈다. 그것은 1866년 12월 13일에 전주 숲정이에서 있었던 장렬한 순교의 영광스런 한 장면이었다.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 순교자 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