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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약전] 성 손자선 토마스 / 김옥희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입력일 2018-02-25 수정일 2018-02-25 발행일 1985-06-23 제 146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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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등 물어뜯으며 배교 안한 증거 보여
고문으로 터진상처가 기적같이 낫기도
◇성 손자선 토마스는 덕산군 홍주면 신리(德山郡洪州面新里) 마을 거더리에서 1843년경에 태어났고 또 이곳에서 성장했다. 이곳은 바로 충청도 내포지방으로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천주교의 온상지였다. 물로 손 토마스의 가문도 초창기부터 벌써 3대째 천주교를 믿어왔던 집안이었다.

비교적 부농 집안의 손 토마스는 결혼하여 아내를 맞았으나 자녀는 없었다. 후에 1868년 무진년 박해때 그의 부친과 형도 순교하게 되었다.

손 토마스는 천주교의 신심과 가풍을 지키면서 대대로 살아온 집안에서 교육받아 왔기 때문에 굳센 식덕과 침착ㆍ근면함이 그의 성격이 되었고 열심한 기도생활이 대부분의 그 생활의 전부가 되었다. 이와같은 그의 생활태도 때문에 그를 보는 마을 사람들은『계명을 잘 지키고 그의 언동은 대단히 신중하고 과감하였으며 젊은이들 가운데 토마스처럼 총명한 청년이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 하였던 것이다.

한편 오랫동안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전교하면서 순교사 사료를 모았던 다블뤼 안 주교나 성직자들은 언제나 손 토마스 집에서 모든 교회전례나 공소예절을 행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고、박해중의 성직자들은 그의 집에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계속된 박해의 와중에서 이 손 토마스 가족들이 많이 체포되어 순교할 수밖에 없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블뤼 안 주교가 체포되고 며칠후 포졸들이 손 토마스가 살고 있는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교우 집들을 샅샅이 뒤진 후 많은 것들을 노획해 가는 일이 생겼다. 마침내 피해자들이 일제히 항거하고 일어나자 고을관리는 정식배상 청구서를 내는 자들에게는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손 토마스도 그래서 덕산관가에 나아가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때 관리가 손토마스에게 천주교 신본 여하를 묻게 되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천명하면서 자신은 사실 죽음이 두렵지마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배교하는 것이라고 용감하게 대답하였다.

물론 배교 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리하여 손토마스는 즉석에서 체포되었는데 관가에서도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다. 매일 고문이 더 잔인해져 곤장을 치다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손토마스의 입에 여러가지 오물을 쏟아 부으면서 그때마다『야、좋지』라고 놀려대었다. 손토마스가『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라고 되물었다. 이때 손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했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 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은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탓었는데 쓸개와 식초대신 이런것들을 내입에 넣어주니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하여 무척 즐겁소』. 또 한번은 손토마스가 맥박이 멈출 정도로 고문을 당해 고통이 심함을 보고 감옥에 함께 있던 동료들이 몹시 측은히 여겨 자기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가며 손토마스를 구출해 주었다. 그리고는 더 치료를 해주지 못해 안타까와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손토마스는『이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모님께서 오셔서 내 상처를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는데、실제로 그 후 며칠이 지나자 그의 상처들은 기적같이 깨끗하게 아물어 붙었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했다.

손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선 것은 병인년 음력 3월이라고 전해지다. 그는 덕산에서 해미로、해미에서 다시 공주로 압송되었다. 공주는 내포지방에서도 가장 큰 곳이었다. 따라서 손토마스가 공주에 닿았을때는 이미 수백명의 교우들이 먼저 와 감방에 갇혀 있었다.

물론 그들과 같은 감방에 수용되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잡혀온 교우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기 그치지 않았다. 그결과 배교한 사람들은 동편에、배교하지 않는 사람은 서편에 줄지어 세웠다. 그 가운데서 서편에 자리잡은 사람은 수많은 신자들 가운데서 유독 손토마스 한 사람뿐이었다. 이에 관장은『이 고약한 젊은 놈아! 너는 세 곳이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배교하지 않겠단 말인가? 만약 끝내 배교하기를 거절한다면 이제부터는 부러진 네정강이로 걸어 다니게 하겠다. 생각해 보라. 너도 부모와 처자가 있는 몸이 아니겠는가? 부모와 처자의 애통한 모습을 생각해서라도 배교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고문하자 그는 침통하게、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이 미련하고 고지식한 놈아. 네가 정녕 배교하지 않는다면、네가 끝까지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네손으로 네살점을 떼내든지 아니면 피를 보이든지하여라』『네가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가 배교한 것으로 판단하겠다』이에 그는『백성들의 어버이신 관장께서 나를 배교자로 판단하시려 하니 나는 관장의 명령에 좇지 않을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두 손등을 물어뜯었다.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손등을 관장에게 보였다. 이제는 관장도 어쩔도리가 없었다.『내가 누차 살아나기를 권했으나 시종 너는 내말을 듣지 않았다. 이젠 너는 살길이 없구나』『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배교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꿋꿋하게 대답하였다.

손토마스는 옥중에서 줄곧 일기를 적어 왔었다고 한다. 그 일기를 가족에게 전해 달라고 옥사장에게 맡겨 두었으나 무엇을 생각하였던지 그는 옥사장에게 맡겨둔 일기를 다시 찾아 불속에 던지고 말았다.

손 토마스는 관장앞에서 손등을 물어 뜯던 날 1866년 5월 18일 공주옥에서 교수형이 진행되었다. 그의 나이 23세 였다.

그가 죽은지 사흘이 지나 손토마스의 아우는 같은 신리 마을에 살던 교우와 함께 형의 유해를 거두려 나섰다. 손 토마스의 아우가 수의를 장만하고 유해를 찾으러 간 곳은 공주읍 밖의 수풀 속이었다. 시체가 잔뜩 쌓여있어 어느것이 손 토마스인지 찾을 길이 막연했다. 그를 단정하기에 손쉬운 표로 물어 뜯은 손등을 가려내니 목을 졸라죽인 흔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썩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