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103위 성인약전] (80) 성 황석두 루까 / 김옥희 수녀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
입력일 2018-02-19 수정일 2018-02-19 발행일 1985-06-16 제 1460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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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지키기 위해 벙어리 노릇까지
황석두 (黃錫斗 俗名:재건) 는 1812년에 충북 연풍에서 부유한 양반 집의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그를 정성껏 공부시켰을 뿐 아니라 과거 급제하여 입신 양명 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20세가 되던 해 황석두는 경성에로 가는 과거시험 길을 떠났다.

어느날 저녁 한 주막에 들어가 묵을때 천주교 신자를 한사람 만나 천주교 교리를 오랫동안 듣게 되었다. 젊은 그는 그토록 유식한 교우의 말에 크게 감명을 받고 그의 주선으로 천주교 교리책을 여러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지 3일만에 집으로 되돌아 와 버렸다.

그의 부친이 그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자기방으로 들어가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입교했으며 자기부인까지도 영세 입교시켰다. 한편 그의 부친은 이 나라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천주교가 가문을 파괴하는 종교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황석두의 부친은 여러 가지로 생각한 후에 여물을 썰던 작두를 마당 가운데로 나르게 하고 아들에게 명하여 목을 작두에 걸라고 하였다. 온 집안이 벌컥 뒤집혀 졌는데 그는 태연히 목을 작두에 내밀었다. 그의 부친은 빨리 밟으라는 엄명을 내렸다가 할 수 없이 통곡하면서 사랑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다시 살아났으나 그날부터 그는 부친이 책망과 매질속에 지냈다. 나무라는 부친이나 꾸중듣는 아들이나 피차 고집불통이었다.

그리하여 황루까는 세상만사를 듣지도 보지도 않겠다고 결심하고서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가족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그에 대하여 대단히 걱정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정월 초하루 설날에 황석두는 읽던 성서를 조용히 내려놓고 그의 아버지 앞에 공손히 세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어서『아버지』라고 불렀다. 매우 놀란 그의 부친은 대단히 감격해서『얘! 석두야 너 말할수 있구나! 네가 믿는 성교란 참 이상하구나! 아마도 그것이 참된 도(道) 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떤 도인지? 나도 다시 생각해 볼터이니 내게 네가 가진 책을 보여 주려무나』하고 뜻밖에도 입교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후 그의 부친을 비롯하여 집안 가족들은 모두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거의다 입교 영세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고 페레올 주교가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성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하느님께 서약하였고 고주교는 그의 아내와 별거한다는 조건하에 황 루까를 사제품에 올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때 교황청에서는 당시 한국에는 여자수도회가 없어 그의 부인이 지낼 곳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부친이 사망하고부터는 그의 친척들이 집안 일을 맡아보면서 아버지의 가산을 횡령함에 따라 황 루까도 자기 유산마저 모두 친척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런 모든 사정을 잘알고 있던 권 페롱 신부는 황루까를 자기 한문선생으로 있게 하였다. 그 후 권신부가 황루까에게 전교회장의 일을 맡기게 되자 그는 이 회장 직분을 가장 훌륭하고 열성적으로 이행해 나갔다. 이어 황루까 회장은 장주교를 돕게 되어 주교와 함께「회죄직지」발간에 기초 원고를 썼다. 그리고 그후 다시 안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그가 검소한 생활인으로 차츰 바뀌어짐에 따라 다른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게되었다.

마침내 병인박해가 일어나 안주교가 체포되어가니 그는 주교의 권고와 포졸들의 엄포를 뿌리치고 자기를 떼어남겨놓고 가려던 포졸들한테 매까지 맞아가면서 끝까지 쫓아가서 스스로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놓아주려고 했으나 헛수고임을 알고 선교사들과 함께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는 관리들한테 성교도리를 열렬히 이야기하자 이들은 그의 생명을 구해 주려고 비밀히 공모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황루까 회장에 대해 목격증인들은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계명을 지킴에 열심하고 충실하였기때문에 모든 이에게 그 이름이 자자하였으며 신자로서 본분을 다하는 그의 태도는 가장 훌륭하였으며 모든 성교교리에 통달한 동시에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는『나는 큰 박해를 바라지는 않지만 작은 박해에 순교 하였으면 제일 좋겠소』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런 점에서 황루까와 비슷한 교우는 한국 천지에 없었다고 할 만큼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누구와도 교리를 토론하였고「회죄직지」가 발간될 때는 모든 교우들에게 성사를 잘 받도록 권유하였다. 그는 정결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으며 1858년부터는 고 주교의 허가를 받아 아내와 별거생활을 하면서 죽을 때가지 그 결심은 변하지 않았기때문에 슬하에 자녀 하나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이와같은 남다른 열의가 대단함을 보고 관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황루까를 더 가혹하게 곤장으로 치게 하였다.

많은 문초와 고문 끝에 드디어 그는 1866년 3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 같은 날 왕의 윤허와 함께 3월 30일 (성금요일)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감옥에서 마지막 식사를 손에 받아든 그는『우리는 지금 하느님이 창조하신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습니다』하면서 기꺼이 먹었다. 안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더불어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그의 차례가 되자 용감하고도 침착하게 참수에 임하였다.

그때 그의 나의 54세였으며 시체는 3일이 지나서야 안주교와 함께 같은 곳에 매장되었다가 얼마후 신자들이와서 모셔다가 장례를 지냈는데 그때가 6월달이었는데도 시체는 하나도 썩지않고 있었다한다.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