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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약전] 79. 성 장주기 요셉 / 김옥희 수녀

김옥희 수녀 <한국순교복자회 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
입력일 2018-02-13 수정일 2018-02-13 발행일 1985-06-09 제 145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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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집을 배론신학교에 기부
신학생 뒷바라지에 전념하다 성 금요일날 참수
◇…성 장주기는 1803년 경기도 수원 지지리(현왕리 근처)에서 한 부유한 외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주기는 호적상의 이름이고 본래이름은 장낙소(長樂詔)였다. …◇

그는 본래 한문에 유식하였는 중병에 걸려 양지(陽智)에 가 있을때 열심한 신자였던 그의 형수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서 중국인 유 빠치피고 신부에게 영세를 했다. 그의 나이 23세(1826)였던 때다. 물론 그는 그이 가족들도 전부 가르쳐서 입교시켰다. 1836년 모방신부가 입국하자 신부는 장 요셉의 열성과 신심을 보고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간을 회장직의 임무를 대단히 열심히 완수했다. 즉 그는 박해시대의 회장으로서 매사를 대단히 슬기롭게 처리하였으며 그의 열심은 어느때 어느곳에서나 표리가 없는 항구한 열심이었다고 목격 증인은 말하였다.

그는 동분서주 활동하면서 살아남은 교우들을 찾아 다녔으며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였고 신앙을 굳게 지켜나가도록 권면하였다.

그는 1845년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에 못견디어 가산과 전답을 전부 정리하여 제천 배론에로 이사하였다. 그가 그곳에서 지낸 10년후 1853년 장 베르뇌 주교는 이곳 배론에다 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뿌르때에 신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에 장 요셉은 자기집을 신학교 건물로 제공하였을 뿐만아니라 신 신부를 도와 신학생들의 뒷바라지와 인근 신자들의 회장직과 신신부에게 한국어까지도 가르쳤다. 그는 그가 하는 일의 댓가를 조금도 바람없이 부부가 합심하여 농사까지도 지어서 그 생산을 신학교에 바치고 자신은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12년간을 청빈과 봉사가운데 신학교에 살면서 활동하였다. 그는 많은 경험과 신심에 균형이 잡힌 인자한 회장으로서 그의 말을 거역하는 교우가 하나도 없을 만큼 존경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항상 회장본분에 대하여『회장본분이 비록 많고 중하나 대략 네조목에 돌아가니 첫째는 교중구령하는 일을 돌봄이요、둘째는 외인의 미혹한 것을 열고 권하여 이단을 끊어버리고 정도로 돌아오게 함이요、셋째는 병든이를 보살피고 위험한이를 붙들어줌이요、넷째는 영해들에게 대세를 붙여줌이니라』라고 말하였다.

1866년 박해가 일어나자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골짜기에 갑자기 들이닥쳐 신학교성직자들을 체포할때도 그는 선뜻 이들앞에 나서서 자기가 이집 주인이라고 말하였다. 장회장의 공적을 잘알고 있는 신뿌르띠에신부는 장요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헌들에게 돈을 주면서 그를 자유인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장요셉 회장은 끝내 사제들을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출발날이 내일로 다가오고 또 막상 다음날 포졸들이 장요셉도 함께 끌고 가기에 이르자 신 뿌르띠에신부가 나서서 만류하는 바람에 하는수없이 장요셉을 석방시켰다.

이에 그는 울면서 배론신학교로 돌아왔다.

그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노루골」에 사는 한 교우집에 다다르자 그때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였다.

포졸들 중에는 신 뿌르띠에 신부를 체포할때 왔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장요셉을 첫눈에 알아보고 그를 잡아 제천 군수에게로 보냈다

군수가 그의 죄상을 하나하나 문초하기 시작하자 장요셉은『내가 참으로 이 서양 사람 집 주인이오』라고 확답하면서 몇몇 고발자들이 대어준 이 모씨를 대라고 할때마다 이들의 입을 막기위해 다른 죄상들을 그대로 다 시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장 요셉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군수는 그의 품위와 점잖은 얼굴을 보아 그를 살려 주려고 여러모로 꾀하며 기다렸으나 장요셉 회장은 끝내 천주교를 배반하지 않았다. 군수는 4명의 포졸들을 시켜 장요셉을 서울로 압송케 하였다. 결박도 하지않은 채 단지 머리에 누런 고깔을 씌우고 붉은 포승을 어깨에 걸치게 하였다. 장 요셉은 감옥에 갇힌 후에도 자칭 서양 선생님들의 집 주인이라고 하고、또 포졸들이 계속해서 이 모씨를 대라고 하는 바람에 많은 문초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다. 1866년 2월 7일 그의 문초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천에서 문초받을 때 네가 사학에 물들었다는 사정과 네가 서양 사람을 모시고 10여년이나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시 더 묻지 않겠다. 따지고 보면 너도 이 나라에 태어난 백성의 한 사람이 아니냐. 과거 네가 사학에 매혹되었다 하더라도 불문에 붙일 터이니 배교하고 나가서 농업이건 상업이건 네 소원대로살아 태평성세의 백성으로 산다면 어찌 즐거운일이 아니냐』하였다. 이에 그는 대답하기를『제가 을사년(1845)제천으로 옮겨가서 성교를 배우니 성교는 실로 대군대부(大君大父)의 가르치심이옵니다. 비록 형틀아래 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배교할 이치는 만무하니 어서 처리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감옥에서 많은 문초와 고문을 받은 후 안 주교 오ㆍ민 두 신부와 함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2월 8일(양력3월24일)에 다른 순교자와 함께 참수되니、그의 나이 64세이며 그날은 바로 예수 수난날인 성금요일이었다.

그후 그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하여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묻혀졌다.

김옥희 수녀 <한국순교복자회 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