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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약전] (78) 성 알렉시오 우세영 / 김옥희 수녀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오륜대순교자 기념광장>
입력일 2018-02-13 수정일 2018-02-13 발행일 1985-06-02 제 145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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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우세영ㆍ알렉시오 16세때 등과했으나 천주교알고 관직포기
성 알렉시오 우세영(禹世英)은 우세필(世弼)이라는 속명(俗名)도 갖고 있는데、1847년 황해도 서흥(瑞興)향교골에서 대대로 선비를 지내오던 양반집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그도 당시의 사회풍습대로 출세를 하기위해 벼슬을 한 과거공부를 하지않을 없었다. 특히、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며 재주가 아주 비범하여 집안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아울러 각별한 관심이 주어졌다. 이에 알렉시오는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마침내 그가 16세때 빛을 보게되였다. 과거에 급제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길은 항상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곳을 어루만져주시는 것이었다. 바로그렇게 갈망하던 과거급제를 위해 시험을 보러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요한을 만나게 되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돌아온 우세영이 벼슬길을 포기한 것이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가 담긴 천주교교리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확신한 뒤 벼슬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가 그렇게 비범한인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입교하기로 결정한 우세영은 울화가 치밀다못해 애소까지 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가 곧 베르뇌 장 주교를 찾았다.

우세영을 본 장주교는 그 학식과 신앙 그리고 용기와 열성을 대단하게 여겼지만 우선 나이가 어리고 혼자 집을 나왔다는데에 마음이 걸려 선뜻 세례를 주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때 우세영은 간절하게 영세를 청하니 장주교는 우선 당시 전교회장을 하던 정의배 마르꼬에게 일단 의견을 물어보았다.

정의배는 우세영과 함께 생활한 후 장주교에게 세례를 주어도 무방하다고 추천하니 우세영은 그렇게 갈망하던 세례를 받을수 있게 된 것이다. 영세 또한 장주교가 친히 베풀어 알렉시오라는 본명을 주니 이때가 1863년이였다.

세례를 받자마자 우세영은 기쁨에 넘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막상 집에 돌아오니 전통적 유교가 몸에 익은 집안식구들의 천대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개월동안 이와같은 천대를 알렉시오는 신앙심으로 훌륭하게 잘 참아 넘겼다. 마침내 남의 구설에 오르기가 두렵고 대하기 부끄럽다하여 그를 감금까지 하게 되었다. 이에 알렉시오는 집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아버지에게 그 뜻을 전하니 아버지도 동의하여『주여! 빨리 아버님과 어머님이 당신 품안으로 돌아가는 은혜를 주소서』하는 기도와 함께 그는 곧 서울 정의배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와같은 기도는 그가 풍부한 학식으로 장주교의 서적번역을 돕고 교회일을 도우면서 서울에서 1년이 지난 뒤 현실로 이루어졌다. 아버지가 알렉시오를 찾는 것이다. 이에 알렉시오는 단숨에 고향으로 가 아버지를 만났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아버지는 알렉시오를 불러 성교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알렉시오의 집안은 성교를 배우기 시작하여 식구는 물론 가까운 친척까지 20여명이 한꺼번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집안 식구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문제가 되어 알렉시오의 집은 가산을 정리하여 평안도 평안근처 논재(畓峴里)로 이사하였다.

그후 1866년 2월 16일 음력 정월 초 이튿날 알렉시오는 정 원선시오 공소회장집으로 세배를 갔는데 바로 이날 공소회장집에 모였던 정원선시오 및 그의 조카 정베드로(창근)、이다미아노、유베드로(정률) 등과 함께 알렉시오는 포졸들에게 잡히게되어 평양 감영으로 이송되게 되었다. 그런데 자신있게 신앙을 고백하던 알렉시오도 그만 두번째 심문에서는 배교하겠다는 말과 함께 풀려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시련은 그때부터였다. 특히 굳세게 신앙을 고백하던 유베드로에 분격한 평양감사가 배교자들로 하여금 유베드로를 매질토록 하여 죽게하니 그 시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우기 시체마저 배교자들이 메고 가 대동강에 던져버리라니 알렉시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베드로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었다. 그의 순교는 또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증거케 하였으니 그가 곧 알렉시오였다.

『우리는 우리의 입과 손으로 하느님을 끊어버렸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무슨 낯으로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땅을 밟을 수 있으며、무슨 면목으로 하느님이 지어주신 하늘을 쳐다보며、땅과 하늘사이에 깔려 있는 하느님의 물건을 감히 쓸수 있읍니까?』하며 통곡 하던 알렉시오는 장주교가 잡혀있는 서울 포도청으로 가 군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한 후 장주교를 만나 지난일들을 사죄받고 장주교와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때부터 심한 문초를 받고 1633년 3월 11일(양)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날까지 온갖 고문과 유혹에도 굴하지않고『나는 지난번 배교했던 일만으로도 많은 고통을 체험했오. 이제나는 나의 스승이신 주교님과 함께 죽기만을 바랄 뿐이오』라며 오히려 군졸들을 나무랐다. 새남터에서 알렉시오의 목이 두번 세번 내리치는 술취한 희광이의 칼 끝 아래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가 1866년 3월 11일이니 1847년 그가 태여난지 20년 남짓된 때이다. 그후 그의 시체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3일 후에와 고개에 안장 되었다가 현재는 절두산 순교자기념 성당에 모셔져있다.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오륜대순교자 기념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