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시간이 고여있는 곳 / 노순자

노순자 (젬마) 소설가
입력일 2018-01-09 수정일 2018-01-09 발행일 2018-01-14 제 3078호 2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양부에게 안긴 아기 예수상이 언제부터 성당 마당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성당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발가락을 오그린 아기 예수상이었다. 천진무구한 표정과 앙증스러운 맨발이 그리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저 소박하고 허름한 성상인데 허둥거리다가도 아기예수상과 눈이 마주치면 마음 가득 웃음이 차오르면서 기쁨과 감사가 피어났다.

마당 공사 중 성상이 훼손되어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는데 신자들은 아쉬워하고 허전해 했다. 아기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즈음 ‘촌스러운 우리 성당의 보물이고 애물’이라 부르던 장궤틀을 사용하지 않고 미사를 서서 드리게 되었다. 장궤틀을 없앤 것은 아니고 미사 경문이 「사제의 영과 함께」와 「내 영혼이 곧 나으리다」로 고쳐지는 시기부터 사용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장궤틀은 35년 전 성당을 지을 때 이미 의견이 갈렸다. 그때 벌써 장궤틀이 사라져가는 추세였는데 신부님이 신자들 의견을 물었고 찬성표가 많았다. 생각이 다른 이들은 있는 것도 없애는 시대에 구식이라며 서서 드리는 미사를 주장해왔는데 그게 35년이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장궤틀은 고장도 나고 헐거워져서 자주 손질을 해야 했다. 보물이지만 늘 점검을 해야 하는 애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장궤틀을 사용하지 않는 미사는 삭막하고 사무적인 느낌이었다. 습관적으로 무릎을 꿇더라도 일단 무릎을 꿇으면 마음이 달라진다. 사람이 뭐라고 당신의 몸을 사람의 양식으로 내주시는가 싶어지고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음이 다행스럽고 저절로 마음이 열리면서 흠숭 찬미의 뜨거움이 우러나기도 한다. 비로소 아버지께 응석 부리듯 의탁하면서 당신을 다 내어주시는 그 무궁하심에 목이 메고 가슴이 더워지는 절실함에 잠기게도 된다. 아무래도 선채로는 마음 깊은 곳의 내밀한 의식을 끌어올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서서는 “네 하느님 저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기는 쉬워도 나의 주님 앞이라는 마음 밑바닥의 감동을 몸이 혼자서 깨닫기에는 무리인 것이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께서는 “신약성경에 무릎 꿇기(proskynein)라는 말이 59번 나온다. 무릎 꿇기는 기독교적 자세이고 그리스도론적 자세다. 현대 문화에 무릎 꿇기가 친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노력하고 배워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아마 우리 본당에 장궤틀이 없었으면 한번 읽고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늘 장궤틀을 사용했기에 무릎 꿇기의 의미와 경신례의 전승부분이 마음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맨발의 아기 예수와 요셉상도, 또한 장궤틀도 한순간도 멈춤이 없는 시간을 살아야 하는 삶 속에서는 만나고 헤어지고 사라지는 당연한 변화일 것이다. 다만 살아 숨 쉬는 한 날마다 순간마다 작별해야 하는 모든 시간이 고여 있는 곳, 그 영원의 시간, 영원의 장소를 생각한다.

노순자 (젬마)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