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12-05 수정일 2017-12-05 발행일 2017-12-10 제 3073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천주학 논증하며 초기 조선교회 기틀 닦아
이승훈 중국 파견해 교리 습득
문중의 강한 문책에도 신앙 지켜

하느님의 종 이벽 초상화.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은 천진암 강학회를 신앙의 모임으로 승화시키고 우리나라 초기 교회를 이끌던 지도자다.

이벽은 1754년 경기 포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이벽은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정약전, 이승훈, 권상문 등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했다. 바로 그 학문이 ‘천학(天學)’, 바로 천주교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1779년 이벽은 권철신(암브로시오)이 강학회를 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천진암으로 찾아갔다. 천진암에서 계속된 강학회에서 이벽은 다른 학자들과 천주학에 관해 논했고, 다른 학자들도 이벽의 논증으로 교리를 깨닫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1783년 이벽은 이승훈(베드로)을 중국 베이징으로 파견하면서 천주교의 교리를 상세히 배우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도록 부탁했다.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이벽은 동료 학자들을 입교시키고 다른 여러 양반들에게도 전교하면서 조선천주교회의 기틀을 닦았다.

하지만 이런 적극적인 선교에 다른 학자들과 논쟁이 생기기도 했다. 당시 고명한 학자로 평판이 높았던 이가환은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고 이벽을 찾아갔다. 사흘에 걸쳐 계속된 이벽과의 토론회 끝에 이가환은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고 평가하면서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1785년 첫 박해가 일어났다. 이벽과 그 제자들이었던 학자들이 명례방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열고 있을 때 박해자들이 들이닥쳤다. 중인이었던 김범우는 체포돼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양반들은 풀려났다. 양반이었던 이벽 역시 풀려나 직접적인 형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박해자들은 각 문중을 통해 신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이벽의 부친인 이부만은 문중회의에 번번이 불려가 모욕과 문책을 당했다. 이벽의 천학운동을 막지 못한다면 족보에서 삭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벽의 굳은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고 더욱 격렬해지는 문중의 문책에 이부만은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벽은 부친의 자살을 막기 위해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 성지에 안치된 이벽의 묘.

하지만 신앙을 따르는 마음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부만은 문중에 아들이 천학운동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통고했지만, 이벽은 오히려 문중회의에 가서 “문중 모두가 천주를 공경해야 함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마침내 이부만은 이벽을 감금했고 그는 감금된 상태에서 숨을 거뒀다.

이벽의 순교는 기록상으로는 박해자에 의해 직접 목숨을 잃은 형태는 아니었지만, 이벽이 천주교 때문에 독살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다. 1979년 이벽의 유해를 이장하기 위해 시신을 발굴, 검시하던 중 시신이 검푸르고 치아가 검게 변색돼있음을 보고 독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