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

[생태칼럼] (21) 창조설화로 본 창조질서- 인간의 근원적 한계 / 조현철 신부

조현철 신부(예수회) 녹색연합 상임대표rn
입력일 2017-11-28 수정일 2017-11-28 발행일 2017-12-03 제 3072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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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3.2%로, 내년의 세계 경제 성장률을 3.7%로 예상했다. 연말이면 자주 등장하는 이런 기사를 볼 때면 드는 물음이 있다. “매년 더 성장하면 행복할까?” “지속적 성장이 언제나 가능할까?” 물론 IMF 같은 기관은 성장 자체에 관한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예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1972년, ‘로마클럽’이 발간한 한 보고서의 제목이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성장의 한계」! 자본의 축적에 기초하는 자본주의는 지속적 성장을 요구하고, 이것은 다시 생산과 소비의 지속적 확대를 요구한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욕구의 지속적 확장이 필요하다. 제어되지 않는 욕구가 탐욕이라면, 자본주의의 작동 기제는 탐욕이고, 여기엔 ‘한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장의 한계」는 자본주의의 기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한 셈이니, 파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성서의 선악과 이야기는 한계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인식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무시한 결과를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창세 2,16-17) 이 근원적 한계는 창조주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창조질서다. 이 한계의 무시나 부정은 존재와 생명의 유일한 원천인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 훼손을 뜻한다.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무시했다.(창세 3,5-6)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하느님이 되려는 제어되지 않은 욕구, 곧 탐욕에 자신을 내맡긴 것이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훼손하는 탐욕은 인간의 삶이 기초하고 있는 “우리 이웃과의 관계, 지구와의 관계”도 망가뜨린다.(「찬미받으소서」 66항; 창세 3,8-19)

우리의 능력이 미미했을 때, 한계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한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주요 원동력은 우리의 욕구이며, 욕구의 충족과 한계의 극복은 발전을 뜻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제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라는 칸트의 명제를 “할 수 있다고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해야 한다.(한스 요나스, 「책임의 원칙」) 인간이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 오늘날, 근원적 한계의 인식과 준수는 한계의 극복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한계는 극복이 아니라 숙고의 대상이다.

한계의 인식과 준수의 실패, 곧 탐욕의 방기는 사회의 극심한 경쟁과 자연생태계의 수탈을 초래한다. 상대가 사람이든 자연이든, 거기에서 “최대한 모든 것을 뽑아내는 것”이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찬미받으소서」 106항) 정규직의 빈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우는 것도, 국립공원과 천연보호구역 등 가장 엄격한 자연보전구역인 설악산에 기어코 케이블카를 놓겠다는 것도 모두 한계를 무시한 이익의 추구에서 비롯되는 아픈 현실이다.

국내총생산(GDP)의 성장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유엔이 ‘세계행복리포트’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더 나은 삶의 지수’를 발표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온 우리나라, 이제는 멈춰 서서 물어보는 것이 더 중요한 때에 도달했다.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졌는가?”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내에서 삶의 행복에 필수적인 다른 요소들을 찾아 구현해 내야 한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오는 “생태적 회심”이 그 어떤 때보다 더 절실하다.(「찬미받으소서」 222, 217항)

조현철 신부(예수회) 녹색연합 상임대표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