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문을 나서며…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동서울대학교 강사
입력일 2017-10-31 수정일 2017-10-31 발행일 2017-11-05 제 3068호 20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수줍음 많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드높은 파란 하늘에 흰 선을 뽐내듯 그리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서 조종사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꿈을 이뤄가는 과정은 멀고도 험난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군인의 길을 선택했고, 몇 번의 좌절과 절망을 겪은 후에야 겨우 조종사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렵게 잡은 그 한 번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밤을 새워가며 공부한 끝에 조종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모두 조종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예비조종사들이 비행훈련 중 퇴교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고 조종사 휘장인 은빛 독수리 날개를 달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군 생활로 34년이란 영욕(榮辱)의 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2017년 10월 31일, 군복을 벗고 새로운 길을 걷게 됐습니다. 군생활을 정의해 보면 ‘꿈을 현실로 이룬 장(場)이자 성장의 시간’이었습니다. 군을 통해서 조종사의 꿈을 이뤘고, 열정적인 배움을 통해 내적인 성장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꿈과 성장을 이루는 데는 많은 인내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업무는 밤낮이 없었습니다. 휴일을 누릴 수가 없는 날이 많았으며, 늘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많은 고난도의 비행임무를 수행하며 생사를 가름하는 위험한 순간을 수차례 넘기기도 했습니다. 비행 중 구름 속에 들어가 죽음을 실감하기도 했고, 칠흑같은 밤에 편대비행을 하다 공중충돌의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조종을 하며, 하루에도 수많은 항공기의 비행을 통제하며, 하느님이 늘 함께하심을 깨닫게 됐습니다. 돌변하는 기상, 지상점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결함의 발생 등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도 몸으로 체험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부대를 안전하게 지휘할 수 있었고, 2560시간의 무사고비행을 이룰 수 있었음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은총과 축복이었습니다.

이제 군에서의 비행은 안전하게 마쳤지만, 새로운 길에서 새로운 이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갈 때면 늘 두려움이 동반하겠지요. 처음 조종간을 잡았을 때처럼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어떤 이는 그 두려움에 매몰돼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주저앉기도 하고, 어떤 이는 두려움을 떨치고 분연히 일어나 불확실한 어둠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도 합니다.

저 역시 두려움이 큽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매몰되지 않고 당당하게 새로운 이륙을 하려고 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라는 말씀이 저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토록 갈망했던 삶인 좋아하는 책을 원없이 읽고, 자유롭게 글을 쓰며, 불러주는 곳에 기쁘게 달려가 강의를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군인의 문을 닫음과 동시에 새로운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으로 굳게 믿습니다.

주님! 이제는 저의 영달(榮達)과 안위(安慰)를 위해 살아가기보다는 이웃을 돌보며 이웃에게 힘이 되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동서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