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전교주일 특집] 수원교구 피데이 도눔 선교지 칠레 산티아고대교구를 가다

칠레 산티아고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10-17 수정일 2017-10-17 발행일 2017-10-22 제 3066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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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금까지 털어가는 가난에도 행복하다, 빠드레가 있기에

피데이 도눔(Fidei Donum). ‘믿음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비오 12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제목으로, 이 회칙에 따라 교구 사제를 사제가 부족한 다른 교구에 파견하는 일을 일컫는다. 한국교회는 피데이 도눔을 통해 보편교회와 일치를 이루며 선교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전교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인 전교를 위한 기도와 실천을 다짐하고,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선교사와 선교지역을 영적·물적으로 돕는 날이다. 전교주일을 맞아 수원교구가 피데이 도눔 사제를 파견하고 있는 칠레 산티아고대교구 마리아미시오네라본당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현재 백윤현(2003년 서품)·문석훈 신부(2008년 서품)가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 철창으로 닫힌 마을, 그리고 양극화

우리나라에서 비행시간만 27시간 걸려 닿는 곳. 시차가 12시간 나는 남반구의 나라. 우리나라와 밤낮도 계절도 정반대인 지구 반대편 나라 칠레 산티아고국제공항에 내려 수원교구 피데이 도눔 사제들이 활동하고 있는 마이푸지역을 향했다. 여느 도시에서나 볼 법한 풍경, 혹은 낯선 나라의 이국적 풍경을 예상하고 마을을 둘러본다. 그래도 산티아고는 한 나라의 수도인데….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철창들 뿐이다.

“빠드레(신부님)! 또 도둑이 들었어요!”

처음보는 풍경에 당혹스러운 마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 디비나프로바덴시아공소의 베르나르디타(50)씨가 다급한 어조로 문석훈 신부에게 연락했다. 그녀가 보낸 사진에는 누군가 공소 벽에 뚫어 놓은 구멍이 찍혀 있었다. 그것도 불과 며칠 전 도둑이 뚫어놓은 벽을 수리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문 신부가 공소는 수리하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해보지만 그녀는 여전히 울먹인다. 도둑이 연달아 4차례에 걸쳐 ‘솔리다리다드(칠레 신자들이 주일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헌하는 식료품 등의 자선물품)’와 헌금을 다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주는 자선주일이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양이 많았다.

문 신부가 사목하는 산티아고대교구 마리아미시오네라본당 인근 지역에서는 소매치기, 도둑 등이 흔하다. 치안이 불안정해 마약과 범죄에 노출된 탓이지만, 가난도 큰 이유다. 이 지역은 정부가 빈민을 위해 20㎡ 남짓한 집을 대규모로 지어 임대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물가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지역의 평균 소득은 우리 돈으로 월 50만 원가량에 불과하다. 물론 칠레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산티아고시에서도 어떤 곳은 지역 내 평균 소득이 월 4000만 원에 달한다. 치안이 안정된 그 지역에서는 굳이 철창을 칠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는 마을의 철창보다도 ‘양극화’라는 철창이 굳건했다.

9월 24일 마리아미시오네라성당서 열린 독립기념일 행사 중 신자들이 매운 라면 먹기 대회에 참가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9월 24일 주일미사에서 전통의상을 입고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신자들.

한 아이가 솔리다리다드(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헌하는 자선물품)를 봉헌하고 있다.

문석훈 신부가 한 신자에게 안수를 하고 있다.

칠레 국기를 들고 있는 신자들.

■ 사제가 부족한 나라

문 신부가 본당을 돌아보자 한 신자가 다가와 안수를 청했다.

신자는 “빠드레가 계셔서 행복하다”면서 미소 짓는다.

문 신부는 “길을 가다가도 로만칼라를 한 모습을 보면 행인들이 안수를 청한다”고 말했다. 칠레인들이 축복을 받는 행위를 좋아하는 면도 있지만, 그만큼 사제를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산티아고대교구의 신자 수는 425만에 달한다. 하지만 교구 사제 수는 230명. 그나마 수도회·선교회 등에서 파견된 사제 300여 명이 함께 활동 중이지만, 신자들이 사제를 만날 기회는 여전히 흔치 않다.

마리아미시오네라본당도 사제가 부족했다. 6개의 공소를 두고 있는 본당은 서(西)대리구에서도 가장 넓은 면적을 관할한다. 관할 면적이나 사목활동을 생각할 때 사제 3명은 족히 있어야할 본당이지만, 백윤현 신부와 문석훈 신부가 오기 전까지는 칠레 사제 1명이 사목하고 있었다.

마리아미시오네라본당을 관할하는 서(西)대리구장이자 교구 성직자·성소자 담당인 갈로 페르난데스 주교는 “슬프게도 현재 칠레는 성소가 많이 줄어 거의 없는 실정”이라면서 “한국 신부들의 열정적인 활동이 칠레 청년사목과 성소계발을 활성화 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나눔으로 풍성해진 전례

9월 24일 주일미사를 위해 성당을 찾은 신자들의 모습이 사뭇 달랐다. 색색의 망토와 모자, 검은색과 붉은색의 화사한 드레스. 칠레의 전통의상이다. 어린이들도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성당을 찾은 신자들에게 칠레 국기를 나눠줬다. 이날은 칠레의 국경일인 ‘독립기념일(Fiestas Patrias)’과 이주민의 날을 함께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하는 날이다. 문석훈 신부도 수원교구에서 보내준 한복을 차려입고 신자들을 맞았다.

이날 미사에서 신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제대의 전례꽃꽂이였다. 이날 전례꽃꽂이는 칠레를 상징하는 물건들과 함께 장미꽃이 꽂힌 항아리에서 넝쿨이 흘러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꾸며졌다. 독립기념일을 맞아 하느님의 사랑이 칠레의 문화에 흘러넘치고 있다는 의미를 표현한 작품이다.

칠레교회도 제대에 꽃을 봉헌하기는 하지만 그저 화병에 꽂아둘 뿐이었다. 문 신부가 이곳 신자들에게 한국의 전례꽃꽂이를 소개한 이래 매주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신자들이 꽃꽂이로 전례를 묵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새롭고 기쁜 일이었다. 전례꽃꽂이를 본 로사씨는 “꽃꽂이에도 전례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점에 놀라웠다”면서 “매주 제대를 볼 때마다 아름다움과 전례 의미를 함께 느낀다”고 했다.

미사가 시작되자 경쾌한 리듬의 기타 연주와 함께 성가가 연주됐다. 신자들은 흥겹게 박수를 쳐가며 함께 칠레 전통음악으로 반주하는 성가를 불렀다. 처음 듣는 노래지만 절로 흥이 나는 리듬이다.

지금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성가를 부르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교육이 열악한 탓에 악보를 볼 줄 아는 신자가 없다보니 같은 노래도 공소마다 음이 달랐다. 하지만 이제는 문 신부가 한국에서 배워온 음악적 지식과 연습방법을 신자들에게 알려주면서 한 가지 음으로 노래를 할 수 있게 됐다. 신자들에게 음악교육을 해준 사제는 문 신부가 처음이었기에 신자들이 느끼는 고마움은 더욱 컸다.

공소 교리교사인 움베르토씨는 “한국 신부님들 덕분에 전에는 알지 못했던 전례 지식이나 전례적인 활동을 많이 알게 된다”면서 “특히 피정 중 칠레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법을 배워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 복음의 기쁨 나누는 선교, 피데이 도눔

“정말 매워요!”

라면을 한 젓가락 입에 문 한 신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혀에 연신 손부채질을 하면서 물을 찾았다. 하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미사 후 성당에서 펼쳐진 독립기념일 축제 중 열린 ‘한국 매운 라면 먹기 대회’의 풍경이다. 먹는 이도 보는 이도 즐겁다. 한국 사제가 본당에 오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즐거움이다.

가난으로 다양한 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이 마을에 한국 사제가 보여주는 한국 문화는 신자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복음의 기쁨으로 이어진다.

본당 종신부제 하이메(57)씨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한국 신부님과 잘 소통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신자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신자들이 전보다 사제를 만나고 찾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면서 “한국 신부님들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냉담하던 신자들이 다시 성당에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문석훈 신부는 “복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삶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면서 “언어의 부족도 문화의 차이도 크지만 그때 그 상황에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것 같아 매일 매일이 기적 같다”고 했다.

■ 피데이 도눔 해외선교에 도움을 주실 분

문의 031-268-2310 수원교구 해외선교후원회

후원 ARS : 1877-0581

후원 계좌 : 신협 03227-12-004926 (재)천주교수원교구유지재단

◆ 칠레교회는

가톨릭신자 비율

인구 70%에 가깝지만

사제 수는 턱없이 부족

많은 선교사제들 활동 중

칠레는 인구의 약 66%가 가톨릭신자다. 4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칠레교회 신자 수는 한국 신자의 2배가량인 약 1100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성소자가 적어 사제 수는 한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000여 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중 절반 이상은 각국 교구 및 수도·선교회 등에서 파견된 선교사제다.

수도 산티아고의 대교구이자 수원교구와 피데이 도눔을 맺은 산티아고대교구도 교구 사제가 230여 명인 것에 반해 수도회나 선교회의 선교사제는 300여 명에 이른다. 산티아고대교구 성직자·성소자 담당 교구장대리 갈로 페르난데스 주교는 “교구 전체에 사제 수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라면서 “많은 선교사제들이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교구와 긴밀히 연대하는 피데이 도눔 사제들에게 특별히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칠레 산티아고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