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 故 김훈 중위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

정리 박지순 기자rn사진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7-09-12 수정일 2017-09-12 발행일 2017-09-17 제 3062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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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있다면 용서 비는 것이 상식… 다시는 억울한 일 없어야”
19년 동안 고통 속에 살았는데 국방부, 전화로만 ‘순직 인정’ 알려
진정 어린 사과하지 않는다면 국민 또 속이는 것과 다름없어
아들 김훈 중위 사망 계기로 군 인권 보호 중요성 깨달아
‘군의문사 특수조사처’ 같은 국방부와 독립된 기관 필요
군에서 억울한 일 겪은 이 돕는 지역 주민센터 단위 부서 필요
가톨릭교회도 목소리 내 주길 앞으로도 약자 위해 노력할 것

아들 김훈 중위 사망 사건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자 처절한 노력을 해왔던 김척 장군.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일시 : 9월 8일 오후

■ 장소 : 서울 명동 우리사랑나눔센터

■ 대담 : 장병일 편집국장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소재가 될 정도로 대표적 군의문사 사건인 고(故) 김훈(요한 비안네) 중위 사망 사건 발생 19년6개월 만인 8월 31일 국방부가 순직 인정 결정을 내렸다. 김훈 중위 아버지인 김척(라우렌시오·75·예비역 육군 중장) 장군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고 주장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왔다.

김훈 중위 순직 인정을 계기로 군인권 전반을 생각해 보는 김척 장군과의 대담을 마련했다. 김 장군은 대담에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시편 85,11)는 성경말씀처럼 장병들을 위한 자애로운 군지휘관의 자세와 정의의 가치를 역설했다.

▲장병일 편집국장(이하 장 국장) : 연세가 벌써 75세가 되셨군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김척 장군(이하 김 장군) : 훈이가 죽고 나서는 항상 걸어다녔습니다. 건강해야 거짓과 맞서 싸울 수 있고 진상 규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늘 걸어다닙니다. 건강 또한 주님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장 국장 : 고 김 중위를 비롯해 온 가족이 신앙이 돈독하다고 들었습니다.

-김 장군 :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머니(엘리사벳)가 명동성당에 다니면서 집안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신 셈입니다. 제 아내(가타리나)는 결혼 전에 개신교 신자였다가 결혼하면서 천주교 신자가 됐습니다. 훈이는 3살 때 당시 제가 근무하던 경남 진해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작은아들 마르첼리노를 비롯해 손자 손녀들도 다 신자입니다.

▲장 국장 : 군생활을 회고하신다면.

-김 장군 : 서울 중·고등학교를 나와 1961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65년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생도생활까지 포함하면 36년간 군생활 했고, 제1군단장을 거쳐 1997년 11월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을 끝으로 전역했습니다. 베트남전쟁과 북한의 청와대 습격사건 등을 직접 현장에서 겪으면서 목숨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신앙이 30여 년 군생활에 큰 힘이 됐습니다. 하느님께서 부하들을 아끼는 훌륭한 상관들을 만나게 해 주신 것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장 국장 : 윤 일병 사망사건과 사단장 성추행사건, 공관병에 대한 육군대장 부부의 갑질 사건 등 군부대에서 사건사고가 이어지면서 군장병 인권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군인권 보호를 위한 새로운 시스템 도입이 필요해 보입니다.

-김 장군 : 아우구스티노 성인 말씀이 먼저 생각납니다. “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떼와 같다”(「신국론」 Ⅳ권)고 하셨지요.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물리력을 갖고 있는 정부기관에 정의가 없으면 강도떼가 된다는 것을 김 중위 사건을 통해 절실히 느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군인권보호관’ 도입 등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 스스로가 주인으로서 자기 권리를 지켜야 합니다. 전국 주민센터에 군대에서 억울한 일을 겪은 이들을 상담하고 제보를 접수하는 부서가 있어야 하고, 우선 천주교회부터 같은 노력을 경주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개인이 하면 힘이 없습니다. 교회 단체들이 힘을 모아서 목소리를 내주기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본받아 한국교회가 정의와 인권을 향해 노력해야 합니다. 적어도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은 교회 지도자들이 우리 사회 정의와 인권을 위해 머리를 맞대는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장 국장 : 아버지로서 보실 때 김훈 중위는 어떤 신앙인이었습니까.

-김 장군 : 훈이가 육사 재학 중 “천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살아서 어떻게 천사가 되느냐”고 물으니 “살아 있는 천사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훈이는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전방 부대에 같이 이사를 다녔습니다. 두 형제가 미사에서 복사를 몇 년 동안 같이 섰고 군본당 수녀님들이 훈이를 좋아했습니다. 아내는 군본당에서 성모회장을 맡아 몸 사리지 않고 오랫동안 봉사했는데 훈이에게도 신앙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훈이가 군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 30번 넘게 이사하는 생활이 힘들어 “군인은 아버지 한 사람이면 된다”고 만류했지만 저를 이어 명예로운 군인이 되겠다는 훈이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항상 올곧은 아이었습니다. 육사 생도시절 공수훈련 받을 때 다른 동기생들은 탈진해도 훈이는 끝까지 버티면서 힘들어하는 동기들을 격려하고 밀어줬습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았습니다. 군과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해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밟힙니다.

▲장 국장 : 19년 만에 김 중위가 순직 인정을 받았습니다. 순직 통보를 받았을 때 어떤 소감이셨습니까.

-김 장군 : 순직 통보를 받고 두 가지 감정이 섞였습니다. 우선 내가 죽기 전에 김 중위를 국립묘지에 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착잡하고 분노의 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원래 순직은 명예회복을 위한 것인데 왜 19년이나 걸렸나 하는 것입니다. 19년 전에 처음부터 똑바로 수사했으면 바로 순직처리와 명예회복이 됐을 것입니다.

대법원은 2006년 12월 유가족이 제기한 국가배상 소송에서 군 당국의 초동수사 과실에 따른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은 김 중위가 자살했다고 판단한 적이 없습니다. 2009년 11월에는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고 2012년 8월 국민권익위원회는 군의 초동수사가 부실해 사망원인이 불분명한 김 중위를 순직 처리하라고 국방부에 시정권고 했습니다. 국방부는 국민권익위 시정권고를 거부하다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바뀌고 나서야 5년 만에 김 중위 순직을 인정한 것입니다. 국회에서도 국방부의 사건 진실 은폐를 지적했습니다. 4개 국가기관 어디에도 국방부의 주장을 인정한 곳이 없습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종교단체와 시민단체들도 김 중위의 죽음에 억울함이 없어야 하고 군이 사과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요구했습니다. 국방부가 달랑 전화 한 통화로 순직처리 됐다고 알려온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군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군의문사를 한국사회 적폐로 규정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지적했기 때문에 김 중위가 비로소 순직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장 국장 : 국방부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김 장군 : 잘못이 있으면 용서를 비는 것이 상식 아니겠습니까. 19년 동안 배신감, 분노와 좌절감으로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정의로운 군대는 잘못이 있으면 사죄해야 합니다. 순직 인정만 할 뿐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으면 국민을 또 다시 속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 국장 : 군 쇄신을 위해 정의를 끝까지 부르짖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김 장군 : 군에서 억울한 죽음이 나오면 국민들은 군에 대해 신뢰를 잃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적개심을 갖게 됩니다.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군대가 운영됩니다. 유사시에 목숨까지 바치러 가는 곳이 군대입니다. 그래서 국민의 군대입니다. 징병제 국가라면 국가는 장병을 보호하고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군지휘부가 눈을 부릅뜨고 장병을 지켜야 합니다. ‘전우애’란 목숨을 바쳐 전우를 지켜주는 자세이고 전우가 죽었을 때 명예회복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국방장관과 각군 총장, 최고 지휘관들이 나서서 전우애를 실천해야 하는데 사고가 나면 자기 영달을 위해 피해자와 희생자에게 다 뒤집어씌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김 중위도 자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장 국장 : 국방부 조사는 어떤 면에서 잘못됐다고 보십니까.

-김 장군 : 총기 소지가 금지된 한국에는 권총 전문가가 없어서 미국에서 유명한 노여수 법의학 박사를 찾았습니다. 미국 뉴욕주에서 8000건의 부검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분이 국회에 타살 소견서를 냈습니다. 그래서 국회는 자살이라는 국방부 조사보고서를 거부한 것입니다. 많은 근거들을 제시할 수 있지만 한미연합사령부 상황보고서를 보면 김 중위 사체를 발견한 시각이 1998년 2월 24일 낮 12시30분인데 오후 2시20분 경에 자살이라고 상황보고를 합니다. 미국 수사관들이 사건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30분, 한국군 수사관이 도착한 것은 오후 4시40분입니다. 언론에는 4시43분 자살이라고 보도됐습니다. 사건 현장에 수사관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한미연합사에서 자살이라고 상황보고를 했다는 것은 군 당국이 미리 자살로 사건을 규정해 버렸다는 것이고 당연히 사실에 입각한 수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김 중위 사망 통지를 받자마자 제가 부대에 달려갔지만 군 당국은 사건 현장에 출입을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유가족이 사건 현장에 입회하고 현장 확인을 한 후에 조사를 시작했어야 합니다.

▲장 국장 : 군의문사, 군인권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큰 역할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 장군 : 군통수권자에게 충심어린 건의를 하고 싶습니다. 김 중위 사건은 미국이나 영국에 가면 타살로 나옵니다. 정의로운 국가, 정의로운 군대를 만들려면 국방부로부터 독립된 ‘군의문사 특수조사처’를 만들어야 합니다. 국민이 세금을 내서 군대를 운영하는데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을 순직처리하지 않으면 아주 부끄러운 나라가 되고 맙니다. 이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김 중위 순직 인정을 계기로 지금이 터닝 포인트입니다.

▲장 국장 : 내년은 김 중위 20주기가 됩니다.

-김 장군 : 내년 20주기에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께서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추모미사를 주례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젊은 장교의 인권이 20년 동안 유린당했는데 염 추기경께서 인권문제를 고민하시고 미사 주례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3성 장군 출신이어서 이만큼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약자들을 위해서도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장 국장 : 김훈 중위 국립묘지 안장식은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김 장군 : 국립묘지 안장식은 아마 한 달 뒤 정도에 할 것 같습니다. 국가보훈처와 협의하고 있습니다. 모교인 육사에서 장례 예식을 하고 국립묘지로 가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방식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김척 장군(왼쪽)이 장병일 편집국장에게 김훈 중위(액자 속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리 박지순 기자rn사진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