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혼을 여는 문 ‘이콘’]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장긍선 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rn국내 이콘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입력일 2017-09-05 수정일 2017-09-05 발행일 2017-09-10 제 3061호 1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16세기 이콘, 시나이 가타리나 수도원.

가타리나(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의 성녀는 여럿 있지만, 그 중 한국 신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성녀 가타리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와 이탈리아 시에나의 가타리나이다. 이들 중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가 공경하는 가타리나는 3~4세기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성녀다.

전승에 따르면, 가타리나 성녀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이었던 콘스투스의 딸이었다고 한다. 성녀는 어린 나이에 성모님의 발현을 보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됐으며, 동정으로 봉헌의 삶을 살 것을 서원했다. 하지만 막센티우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 되었을 때, 성녀는 우상으로 섬기는 신들의 신전에 제물로 바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해 갖은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성녀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황제는 최고의 이교도 철학자 50명을 소집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논쟁을 시켰다. 하지만 이교도 철학자들은 성녀의 언변을 당해내지 못하고 굴복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믿겠다고 선언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황제는 성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가타리나 성녀가 채찍질을 당하고 투옥됐을 때, 황제의 부인인 막시밀라 왕비와 프로프리우스 장교가 감옥을 방문했는데, 성녀는 그들에게 참된 신앙에 대해 이야기해 감화시켜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했다. 심지어는 그들을 따라온 200명의 군사들까지도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이들 역시 모두 처형돼 순교했다. 막센티우스 황제는 고문으로 성녀를 배교시키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혼을 제안함으로써 아름답고 현명한 성녀를 꺾으려고 했지만 그는 동정의 삶을 봉헌했노라 선언했다. 이에 격노한 황제는 날카로운 날이 여러 개 붙어있는 바퀴에 찢기는 형에 처했지만, 톱니바퀴는 성녀의 몸에 닿자 부러지고 튕겨나가 오히려 옆에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죽고 말았다. 마침내 황제는 왕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녀를 참수형에 처해 순교하게 했다. 그때 성녀의 잘려진 목에서는 붉은 피 대신 하얀 액체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후 천사들은 성녀의 시신을 시나이산 아래로 옮겨와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도 해마다 성녀의 축일이면, 우윳빛 액체와 기적적인 치유의 기름이 그녀의 무덤에서 흘러나온다고 한다. 52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녀의 무덤 위에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무슬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높은 담으로 둘러져 있으며, 작은 모스크도 안에 세워져 있다. 현재 이 수도원에서는 그리스계 수사들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이 수도원은 오래된 성경 필사본(시나이 사본)이 발견된 곳이며, 성화상 파괴논쟁 때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6세기 성화(이콘)들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긍선 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rn국내 이콘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