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레지오는 나의 모든 것 -「인꼴라마리애」문태준 단장의 활동 체험기] 15 이주의 변(상)

입력일 2017-07-21 수정일 2017-07-21 발행일 1994-10-30 제 1927호 10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73년 꾸르실료 후 여생 봉사 다짐

교회 일에 완전 몰두…사업도 번창
지난 회로 인꼴라 마리애 제1차 활동 보고서를 완료한 문태준 단장은 제2차 활동 보고에 앞서, 캐나다로 이주하여「레지오 선교사」로 활동하게 된 배경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이 내용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항상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기에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뿌리」를 생각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버렸다.

우리들의 뿌리는 가난에서 비롯된 역사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가난으로 인해 생긴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님의 임종시 시원한 사이다 한 병 사다 드리지 못해 생긴 어린 마음에 박힌 가시. 일등병의 몸으로 최전방부대 앞 쓰러져가는 초가에 어머니를 모시고 상급자의 눈치를 살펴가며 봉양해야 했던 기가 막힌 청년기 때의 사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예리한 못이 되어 아마도 영원히 나의 삶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나의 가슴을 짓누를 것 같다.

그러나 춘궁기 보릿고개 시절의 일들을 딴 동네 얘기하듯 하면서 한낱 옛 이야기로 접어버릴 만큼, 또 우리의 자식들에게 그때 이야기들을 교육적인 측면에서 들려주면『아빠는 또 그 이야기세요』하며 듣기를 싫어하는 전혀 딴 세상이 된 오늘의 한국이다.

일등국가, 일등국민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인들도 한 평생「캐딜락」이라는 고급 승용차 한 번 못 타 보고 힘들게 한 세상 살다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봇짐 지고 이민 온 한국인들이 20∼30년 사이에 그토록 성장해 현지인들까지 고용하고 고급 주택이나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고 신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도 역시 부모님들의 지난 세월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하겠다.

내가 떠나온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이 지금처럼 풍요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위의 모든 분들이「문 바오로는 성공했다」라고 인정해 줄 만큼 사회활동이나 사업을 어느 정도 이룩했고 경제력도 여유가 있게 되어 맡겨주신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리라 마음 먹고 나름대로 선공에 힘쓰며 살았다.

3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에 걸쳐 사업이 번창하고 뜻한 바를 이룩하여 인간적인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만끽하며「행복하다」고 느낄 때마다 무엇인가 하나를 잃고 허전한 듯한 공허함이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흑자를 내기 위해서는 소위 신앙을 가진 자로서 마땅히 버려야 할 불의한 것들과 타협해야 하는 괴로움 때문이다.

내가 운영했던 사업은 전자통신기기(산업용 무전기) 생산업이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산업용 무선전화기를 구입해 쓰는 수요자는 정부 기관이나 극히 일부의 정부 투자기관이었다.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투자하여 개발한 기기를 구입해 줄 수요처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그나마도 이제 막 국산화된 기기의 성능문제를 제 궤도에 올려 인정 받기까지는 무수한 애로와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 당시 극심한 사업상의 어려운 고비를 겪고 있을 때 꾸르실료에 불림을 받았다. 3박 4일간 용광로의 쇠처럼 달구어진 나는 폭포수와 같이 넘쳐흐르는 은총을 느꼈다.

『이렇게 큰 은총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생각하면서 또다시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해내며 비천한 나를 이토록 좋은 잔치에 초대해 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렸다. 실로 하느님은 오묘하신 분이시라고 새삼 느꼈다.

나 또한 흔히들 말하는 서민계급에 속하는 잡초인생이 되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시어 이토록 깊은 사랑과 감사를 체득케 해주셨다는 생각이 드니 하염없는 눈물을 삼키며 꾸르실료를 떠나는 현장에서 성체조배를 했다.

온 정성과 마음을 다 바쳐 머리 조아리며 조배드렸다. 그리고 굳게 결심했다.『주님!저를 이토록 변화시켜 준 꾸르실료를 위해 여생을 다 바쳐 봉사하겠습니다.또 현재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마리애 단원생활도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굳게 다짐하고 약속드렸던 날이 바로 1973년 8월 26일이었다. 한남동의 꼰벤뚜알 수도원 마당에서의 감격에 찬 노래잔치는 나를 더욱 뜨겁게 했다. 본당 울뜨레야에서는 분에 넘치는 환영을 해주셨다. 이를 통해 나의 결심은 점점 더 굳어져갔다.

서울대교구「남성 제19차 꾸르실료 동기회」는 모범적으로 이끌어졌다.동기생 중 이계중 신부님, 김수창 신부님,고명철 신부님 그리고 당시에는 서품 받기 전이었으나 꼰벤뚜알 수도회 원장도 역임하신 박문식 신부님을 비롯, 고인이 되신 공덕종 회장님, 그 어느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허필수ㆍ허기 형제 등 모든 분들의 열정적인 사도직 수행은 19차 동기 모임을 더욱 빛나고 힘차게 만들어 주었다.

나도 무엇인가 일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제20차 꾸르실료」이후 매번 듀링꾸르실료 음악 봉사자로 헌신했다. 또한 매주 레지오 쁘레시디움 주회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차츰 두 단체에 깊이 빠져들어 봉사하다 보니 교회 일 70%, 회사 일 20%, 가정 일 10%로 나의 일과가 짜여졌고「미쳤다」는 소릴 듣게 될 정도였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애로와 난관은 극복되고, 개발한 기기도 우수품으로 인정 받게 됐다. 특히 일본의 유수한 업체와 기술제휴 및 대리점 계약은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생한 보람이 이제서야 나타남을 느끼며 재화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데 노력하며 더욱 신나는 삶을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