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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계신 곳, 그 곳에 가고 싶다] (2)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

방준식 기자
입력일 2017-07-18 수정일 2017-07-18 발행일 2017-07-23 제 3054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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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속에 다시 세워진 성전, 대전의 어제와 내일을 잇다
전쟁 후 지어진 고딕양식 성당
기둥 없는 성전, 건축사적 가치 높아 
2014년 등록문화재 제643호로 지정

본당 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며
정체된 원도심 한계 벗어나기 위해
담벼락 없애고 열린 문화공간 계획
청년과 함께 하는 ‘젊은 성당’ 희망

파격적인 요소를 잘 살린 대흥동성당은 대전 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문화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사진 박원희 기자

대전의 원도심 지역인 중구 대흥동. 1905년 경부선 철도와 함께 근대가 시작된 지역답게 건물과 골목 곳곳에 근대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1990년대에는 침체기를 겪었지만 2000년대 들어 소극장과 갤러리 등이 들어서 예술가들의 활동 장소로 부각되면서 ‘문화 중심 도시’로 뻗어나가고 있는 곳이다. 이곳 대흥동 중심에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본당(주임 박진홍 신부)이 자리하고 있다. 오는 2019년 설립 100주년을 맞는 대흥동본당은 대전 지역 천주교 역사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문화 중심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웅장한 대흥동성당 건축물은 ‘파격’ 그 자체다. 대흥동성당 앞에서 그 전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개가 절로 높은 하늘을 향한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있는 형상을 지닌 대흥동성당 첨탑은 높이 82m에 달한다. 1962년 완공 당시 대전 시내 어느 곳에서나 보일 만큼 지역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모더니즘 유행에 따라 고딕 양식 요소를 최대화했다. 적벽돌로 지어지던 당시 교회 건축물과는 달리 시멘트 벽돌로 마감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적용했다.

대흥동성당 정면 현관 위에 있는 12사도상. 고 이남규, 최종태 교수가 무명 시절 조각한 것으로 두 미술가의 특징이 잘 살아있다.

성당 정면 현관 위쪽으로 12사도상이 보였다. 사실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부조(형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한 조각품)들이다. 이 12사도 부조는 교회 미술의 선구자라 불리우는 고(故) 이남규(루카) 공주대 교수와 최종태(요셉)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가 젊은 무명 시절 함께 만들었다. 지역 복음화 중심지가 될 거대한 성당을 짓는데 무명 작가들의 작품을 과감히 설치한 것이다.

고딕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기둥이 없다. 전형적인 고딕 양식을 탈피해 건축사적으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성전에 들어가보니 거대한 내부에 기둥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보통 고딕 양식 구조에서는 중앙 신자석과 양쪽 통로를 구분하는 기둥을 세우는 ‘3랑식’을 사용하는데, 대흥동성당은 이를 과감히 탈피했다. 건축사적으로 그 가치가 크게 평가받는 이유다.

대흥동성당에 그려진 벽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앙드레 부통 신부 작품으로 강렬한 색채로 표현돼 있다.

제대 양쪽으로는 프랑스 출신 앙드레 부통(Andre Bouton, 1914~1980) 신부 작품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와 「예수 그리스도」 벽화 2점이 눈에 띈다. 원래 성당 벽면에는 이 벽화들을 포함해 14처마다 벽화가 부통 신부에 의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2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워진 상태다.

부통 신부는 한국 선교사 시절에 성미술 토착화를 시도한 인물로 유명하다. 구미 원평성당, 상주 함창성당 등에도 그의 작품이 설치돼 있는데 굵은 선 안을 강렬한 색채로 채워넣는 독특한 표현법을 구사했다. 김경란(마리아·대흥동본당) 작가는 “부통 신부님 작품을 복원하기 위해 8월 중 해당 자료가 있는 프랑스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파리 제1대학에서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 작가는 지난 2015년 대전월드컵경기장 입구에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기념 조형물을 조각하기도 해 유명세를 탔다.

성당 마당에 있는 고 이남규 교수 작품인 성모상.

성당 마당에 들어서니 고 이남규 교수가 조각한 성모상이 눈에 들어왔다. 1964년 설치된 성모상은 3m 높이로 매우 큰데 좌우 균형이 맞지 않고 얼굴선이 투박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예수상으로 착각할 정도다. 그 표정도 우울해 우리가 흔히 아는 ‘자애로운 성모상’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독특한 성모상에 대해 박진홍 주임신부가 설명하는 내용을 듣고 있자니 성모상을 다시 한번 경건하게 바라보게 된다. “제가 생각하는 이 성모상의 의미는 바로 비참했던 한국전쟁 직후인 1960년대, 식구를 살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노력했던 한국의 어머니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신자들도 성모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많은 은덕을 입고 있습니다.”

대흥동본당 역사는 1915년 대전 ‘생곡’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작은 공소가 생기면서 시작됐다. 이후 1919년 대전 첫 성당인 대전본당이 대전시 목동에 설립됐다. 당시 성당 주변에는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는 신자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선교와 교세확장을 위해 지금의 대전역 부근 시가지로 성당을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대전본당은 지금의 대흥동본당 자리로 옮겨져 ‘대흥동 시대’를 열었다. 한국전쟁은 대흥동본당 역사에 있어 아픔이자 큰 전환점이 됐다. 1950년 7월 전쟁 포화 속에 대흥동성당 건물이 파괴됐다. 그해 9월에는 대전 지역 성직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건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독립포교지였던 충남지역은 1958년 대전대목구로 정식 승격됐고, 1962년 교계제도 설정과 함께 대전대목구가 대전교구로 바뀌었다. 대흥동성당도 1962년 12월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대흥동성당은 2014년 등록문화재 제643호로 지정됐다.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대흥동본당 설립 100주년을 앞두는 의미로 지난 7월 1일 포럼이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이상희 목원대 건축학부 겸임교수는 “대흥동성당은 종교적 소명뿐만 아니라 대전 원도심이라는 장소에 대한 기억을 제공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또 “근현대 건축 스타일을 반영하고 대전이라는 도시 특징을 가장 이상적으로 형상화해 표현해 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대흥동본당은 이제 지역과 함께 하는 ‘젊은 성당’으로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교좌성당으로서의 권위보다는 지역과의 소통을 중시하겠다는 것이 박진홍 주임신부의 포부다. 교구 청소년국장을 오랜 기간 역임했던 박 신부는 “우리 본당을 청년들이 넘치는 본당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그는 “새로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될 청년들에게 이제 교회가 먼저 나서 끌어들이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 문화가 부족하고 원도심이 정체돼 있는 현실에서 성당조차 고립되고 단절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박 신부는 물론 본당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박 신부는 성당 주변에 가칭 ‘신앙 정원’을 만들어 신자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이 편안하게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담벼락’이 없는 성당을 만들어 세상과 소통하는 문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흥동본당은 성당 옆 대전가톨릭문화회관 1층에 ‘공간 1919’라는 휴식 공간을 만들어 공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또 지역을 대표하는 대흥동본당이 100주년을 앞두고 좀 더 그 독특함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박 신부의 생각이다. 성전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앙드레 부통 신부 작품을 복원하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박 신부는 “인도네시아 지역 성당을 가봤더니 성화가 모두 현지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등 개성을 띠고 있었다”며 “우리 성당도 한국적인, 또는 대전이라는 지역 특성을 최대한 살린 모습으로 변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