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최남순 수녀 교도소 일기] 68 가정 파괴범은 누구인가 4

입력일 2017-07-13 수정일 2017-07-13 발행일 1993-02-21 제 1843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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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회와 회한의 내용담긴 소식 보내와
"제 허물이 희게 되도록 노력하렵니다"
그레고리오는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사랑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데다가 형제간에 따뜻한 우애도 없는 살벌한 환경 속에서 삶의 의욕마저 잃고 자포자기한 나머지 될대로 되라는 그런 심정에서 그같은 무서운 수렁에 깊이 빠져든 것을 생각할 때 가엾기만 했다.

『수녀님. 녹음이 우거지고 신선한 공기를 언제나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는 계절, 답답한 숨을 토해 내기도 하고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가련한 한 사람이 수녀님께 문안드립니다. 언제나 수녀님 앞에 서면 부끄럽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도 시작되었습니다. 지구상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이 왔다가는 사라지고 그러한 굴레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나 봅니다.

조용히 주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시는 수녀님, 말은 없어도 그리스도의 행한 마음들을 조건 없이 행하여 주시던 수녀님, 눈물겹게 감사드립니다. 수녀님을 떠올릴 때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인간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언제나 깊이 생각하게 되고 제 자신속에 머뭅니다.

수녀님 그간에도 평안하시겠지요 다녀가신지 이틀 뒤, 이 글을 씁니다. 이곳이 바로 집 집필장소이거든요. 감정이 아주 미묘해요. 정성으로 사서 차입해 넣어주신 한복, 지금 볼펜심이 묻을까봐 여간 조심이 아니거든요. 하이얀 저고리의 색처럼 변화되어 깊이 통회하고 묵상기도 열심히 하여서 제 허물이 희게 되도록 노력하렵니다.

성서는 요즘 마태오 복음서를 읽고 있는데 아마도 그레고리오는요 돌밭에 떨어진 씨앗 그런가요? 사실 이젠 염치없다는 표현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렇지가 못해요.

멋진 곡예를 하고 있어요. 제비 한 마리가요. 그리고 뜰 옆에 담쟁이가 아주 작은 노란꽃을 피웠구요. 뜨문뜨문 나팔꽃도 분홍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전에는 잘 못 느꼈거든요. 이젠 그렇지가 못해요. 아주 작은 일에까지 섬세하게 집착과 관심이 가니 자신이 아주 바보 같아요.

하지만 절대자께서 배려로 이 인생을 연장시켜 주셨잖아요. 감사할래요. 매사에 충실하며 깊이 반성하여서 사랑하는 섬세한 마음으로 나와 접해 주셨던 모든 분을 위해 기도하렵니다.

수녀님 조용히 성가 불러볼까요. 갑자기 성가가 부르고 싶고 멜로디가 떠오르네요. 『내가 사랑받았고 은총속에 산 것은 성신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셨도다. 주의 참된 평화요. 신성한 감격이요. 주는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주님안에 영원히 나의 삶을 드리니 나의 모든 괴로움 멀리 사라지도다 항상 주께 바라면 근심걱정 없으리. 주는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성가를 부르면 마음이 정화되고 가라앉으면 깊은 감동에 젖게 됩니다. 수녀님 저는 행복해요. 주님이 계시고 수녀님이 계심을 믿는 한 저는 더 바랄것이 없어요. 오늘 여기서 펜을 줄입니다. 수녀님께 언제나 건강 주시어서 기다리는 많은 외로운 손길들이 싱싱하게 바로 피어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