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교구 이곳저곳] (23) 안산 사사동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7-04 수정일 2017-07-05 발행일 2017-07-09 제 3052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정약종의 유해가 100여 년 간 머문 가족묘지
가족에 전교하고 존경받아온 복자
1981년 천진암성지로 이장 전까지 선산에 묻혀 후손들 보살핌 받아

안산 사사동에 있는 정약종의 묘비.

최초의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펴내고 명도회의 초대 회장을 수행하는 등 우리나라 초기 교회를 이끈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오늘날 그의 묘지는 천진암성지로 옮겨졌지만, 그의 묘소가 100여 년의 시간동안 자리했던 곳이 있다. 바로 경기도 안산 사사동 일대다.

수인로 양촌IC 인근, 정약종 복자가 100여 년의 시간을 잠들어있던 땅을 찾아 논밭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들어간다.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61. 목적지 근처까지는 왔지만 내비게이션에는 더 이상 길이 표시되지 않았다. 지도를 펼쳐들고 시골길을 따라 들어간다. 좁은 시골길에서 몇 번을 헤맨 끝에 사사안골4길에서 이어진 비포장도로를 발견해 목적지에 다다랐다.

‘朝鮮天主敎 明道會會長 羅州 丁公아오스딩若鍾之墓.’(조선천주교 명도회회장 나주 정공 아오스딩 약종지묘)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조성된 묘지에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77년 4월 8일 당시 교구총대리였던 정덕진 신부와 정약종의 후손들이 세운 정약종의 묘비다. 검은 비석에 새겨진 복자의 묘비는 그를 ‘조선천주교 명도회 회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명도회는 한국교회의 첫 평신도 단체다.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설립한 명도회는 신자들이 교리를 깊이 배우고 다른 신자들과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전할 수 있도록 활동하는 사도직단체였다.

명도회 산하에는 여섯 군데의 집회 장소 육회(六會)가 있어 각 모임마다 회원들이 활동했고, 그 중심에는 회장인 정약종이 있었다. 「황사영백서」에는 “회원들은 물론이고 신자들도 이에 감화되어 모두 전교를 일삼았으므로 경신년(庚申年, 1800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하루하루 입교자가 불어나갔다”고 명도회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복자는 명도회 회장으로서 신자들을 위해 봉사했고, 또 최초의 한글교리서 「주교요지」를 편찬해 신자들을 가르쳤다. 이런 복자의 활동에 많은 신자들이 교리를 배웠고, 또 많은 이들이 입교했다.

하지만 그런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복자는 박해의 가장 큰 표적이 됐고,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된 그해 4월 8일 순교했다.

순교 후 복자는 고향인 마재 인근의 웃배알미 검단산 기슭에 묻혔다가 후에 후손들이 모여 있는 안산 사사동의 선산에 이장됐다. 신앙을 지키려고 박해를 피해 강원도로 피신해 있던 복자의 집안 사람들은 100여 년 전에 조상의 고향 인근인 안산 사사동에 이주해 살았다. 신앙을 지킨 정씨 집안의 후손들은 복자의 묘소를 더 정성껏 돌보기 위해 복자의 묘소를 가까이에 옮긴 것이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정약종 묘비가 세워져있는 정씨 집안 가족 묘지.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그를, 그리고 그의 신앙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얼마나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는지가 느껴졌다.

복자는 생전에도 가문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전교로 온 가족이 깊은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1801년에는 그의 아들 복자 정철상(가롤로)이, 1839년에는 그의 부인 성녀 유 체칠리아, 아들 성 정하상(바오로), 딸 성녀 정정혜(엘리사벳)가 순교로 믿음을 지켰다.

복자의 묘소는 마을 사람들이 ‘앞산’이라고 부르던 정씨 집안의 선산에 자리하다, 선산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면서 1973년 5월 10일 인근의 정씨 가족 묘지로 이장했다. 그리고 1981년 10월 31일 천진암성지에 안장됐다.

당시 묘이장 미사를 주례한 김남수 주교는 복자의 후손들과 신자 1000여 명이 참례한 미사 강론을 통해 “온갖 고통을 당하다 순교한 선조들의 묘가 잊혀져온” 현실을 한탄하면서, “순교자들의 묘가 우리 앞에 자리 잡는다면 우리의 연약한 신앙이 얼마나 굳세어지겠느냐”고 말하며 후손들이 지켜온 복자의 묘의 가치를 역설했다.

비록 지금은 천진암성지가 복자의 묘소지만, 사사동의 묘소도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묘소는 단순히 복자의 묘소였던 자리가 아니다. 100여 년의 시간 속에 복자의 유해가 진토로 스민 자리다. 김 주교의 말처럼 우리 앞에 자리한 복자의 묘를 바라보면서 복자의 유해가 땅에 스며들듯, 그 신앙이 나의 신앙 안에 스밀 수 있길 기도하며 묘소를 떠났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