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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성화의 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영성을 돌아보다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7-06-13 수정일 2017-06-13 발행일 2017-06-18 제 3049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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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사랑하듯
신자를 사랑했다

6월 예수 성심 성월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마음,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깊이 묵상하는 시기다. 그중에서도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것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23일)에 지낸다. 교회는 바로 이 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낸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살아갈 뜻을 다지고 기도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마련한 날이다.

지극히 단순하지만 깊은 성덕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사제의 모범을 보여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사제 성화의 날’을 앞두고, 평생을 예수 성심께 봉헌한 비안네 신부의 삶과 영성을 돌아본다.

■ 프랑스 혁명과 박해 받던 교회, 성소를 꿈꾸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1786년 프랑스 리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다르딜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7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프랑스 혁명은 온 사회를 뒤흔들었고, 교회는 혁명 세력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의 마음에 성소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13세 되던 해. 교회가 박해를 받는 상황이었기에 첫 영성체 나이가 된 그는 이웃 마을 에퀼리에서 간신히 교리 공부 과정을 마쳤다. 혁명의 와중이었기에 그는 건초더미로 창문을 가려둔 한 농가에서 은밀하게 첫 영성체를 하게 됐다. 그때 목숨을 위협받는 가운데에도 굴하지 않고 사목활동을 하던 사제의 모습에 감명을 받고, 어린 소년 비안네는 사제 성소를 꿈꾸게 된다.

■ 학업 능력 결격자

1806년, 그는 20살이 돼 신학교를 가기 위해 에퀼리에 있는 발레 신부를 찾아가 면담을 한다. 발레 신부는 아무런 기초 교육을 받지 못한 그를 예비 신학생으로 받아들였고, 비안네는 그곳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1811년 발레 신부의 추천을 통해 비안네는 이듬해 리옹 교구 신학생으로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813년 리옹의 성 이레네오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비안네에게 공부는 가장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학교에서 정기적인 사정회가 열릴 때마다 교수 신부들은 비안네의 지적 능력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에 무려 11번이나 낙제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곤경 속에서도 비안네 신부의 품행과 성덕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한 번은 지도 신부가 비안네의 학업을 걱정해 성적이 우수한 후배 학생에게 그의 공부를 개인적으로 도와주도록 지시했다. 그 학생은 성심껏 비안네를 가르쳤지만, 설명할 때에는 알아듣는 것 같다가도 후에 다시 물으면 마치 처음 이야기를 듣는 듯 반응했고 학업에 도무지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화가 난 후배 학생은 비안네의 뺨을 때렸다. 비안네는 자기보다 어린 학생에게 뺨을 맞았지만, 즉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자신을 멸시하고 박해한 이들을 용서했던 예수와 닮은 모습이었다.

■ 척박한 시골 본당, 아르스로

우여곡절 끝에 1815년 8월 13일 사제품을 받고 첫 임지로 간 아르스는 사목활동을 하기에 형편없는 곳이었다. 주민이라고 해야 불과 230여 명 남짓, 이들에게 주일이란 그저 들판에서 하릴없이 노닥거리거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기 편한 날에 불과했다.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한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성당으로 들어가 예수성심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예수 성심께 봉헌했다. 극도의 겸손함을 지녔던 비안네 신부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겼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이 짧은 기도 안에 비안네 신부의 모든 영성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든 이루시는 일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자신은 미천한 종으로서 오직 예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일 뿐이었다. 비안네 신부를 통해 예수님은 엄청난 일을 이루었다.

비안네 신부의 사랑의 기도는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모범이다.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느니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더 바라나이다.… 순간순간마다 제 혀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제 마음이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기를 바라나이다.”

■ 시골 본당의 기적, 세상에 전해지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탁한 후, 비안네 신부는 사람들의 회심을 기도하며 고행의 삶을 살았다. 오직 감자와 거친 빵만 먹었다. 금식과 고행을 밥 먹듯 했고, 성당과 고해소에서 매일 10시간 이상을 보내며 조금의 짬이 날 땐 가정과 환자 방문을 했다. 사제관의 모든 물품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고 딱딱한 침대에 짚을 깔고 잠을 잤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기적처럼 돌아서기 시작했다. 한결같은 비안네 신부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주민들이 하나둘씩 주일이면 성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기도시간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은 즉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비안네 신부는 특히 고해성사에 온 힘을 기울였다. 죄를 뉘우치는 고해소 안의 신자들과 함께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죄의 고통을 나눴다. 비안네 신부는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마귀를 볼 수 있는 은총을 받았기에, 기도와 희생을 통해 그 마귀들을 물리쳤다. 마귀의 방해가 없어지자 사람들은 죄의 부끄러움을 이기고 자신의 죄를 털어놓았고, 영혼의 생기와 활력을 얻었다.

변화된 마을의 모습은 인근에 널리 퍼지게 됐고, 순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해에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아르스를 방문해 고해성사를 받았다. 몰려드는 순례자들의 고해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비안네 신부는 죽을 때까지 매일 16시간에서 18시간가량을 고해소에 머물렀다.

■ 사제의 마음은 예수의 마음

1859년 8월 4일 새벽,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총 41년 5개월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비오 9세 교황은 그를 가경자로 선포했고, 비오 10세 교황은 1905년 1월 그를 시복하면서 모든 본당 사제들의 모범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1925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성인으로 선포됐다.

예수 성심께 자신을 봉헌한 비안네 신부는 평생에 걸쳐 예수의 마음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갔다. 사제들은 온전히 교회를 위해, 하느님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 봉사자들이다. 자기 마음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을 알고 배우고, 그 마음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사제의 마음은 곧 예수의 마음이다. 비안네 신부는 이처럼 예수의 마음을 닮아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삶을 가득 채우고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한 사제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